역사적 인물

솔리튜드: 과들루프 노예 저항의 상징

솔리튜드(Solitude, 약 1772년~1802년?)는 혼혈 출신이라는 이유로 '물라토 솔리튜드'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과들루프 흑인 노예 저항 운동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한 명으로 기억됩니다.

노예로서의 삶

오늘날 솔리튜드의 삶에 대해 알려진 것은 많지 않습니다. 그녀는 약 1772년경 과들루프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머니 바양구마이(Bayangumay)가 서인도제도로 이송되는 배 위에서 백인 선원에게 폭력을 당한 결과 태어난 아이였습니다. 노예 어머니의 딸이었고 혼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로잘리(Rosalie)라는 이름을 가진 이 아이 역시 태어나면서부터 노예의 신분을 짊어졌습니다.

20여 년에 걸친 세월 동안 솔리튜드는 과들루프에서 노예제의 공포, 가혹한 처벌, 자유의 박탈, 끊임없는 억압을 몸소 겪으며 자랐습니다.

프랑스 혁명과 시기를 같이하며, 1790년대 초부터 과들루프에도 소요와 폭동이 잇달아 일었습니다. 루이 16세의 처형 이후 공포 정치의 여파는 바다를 넘어 서인도제도까지 미쳐, 플랜테이션 농장주 가문과 성직자들은 처형되거나 도피의 길에 나섰습니다. 노예들은 집단으로 도망쳐 마룬(maroon, 도망 노예) 공동체를 형성했습니다. 1794년 2월 4일, 프랑스 국민공회는 노예제를 공식 폐지하고 식민지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동등한 권리를 지닌 프랑스 시민의 지위를 부여했습니다. 그러나 이 소식이 과들루프에 닿았을 무렵, 섬은 이미 영국군의 점령 아래 있었습니다.

노예제 부활에 맞선 저항

갓 자유를 되찾은 많은 전직 노예들이 영국군과 싸우기 위해 무장 부대에 입대하는 동안, 솔리튜드는 마룬 공동체에 합류하여 한동안 그들과 함께 생활했습니다. 그러나 폐지의 환희는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1802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노예제를 재건하기로 결정하면서, 리셰팡스(Richepance) 장군에게 모든 반란을 진압하고 해방된 노예들을 다시 사슬에 묶으라고 명령했습니다. 1802년 5월 4일, 4천 명으로 구성된 프랑스군이 푸앵타피트르(Pointe-à-Pitre)에 상륙했습니다.

마르티니크 출신의 지식인이었던 보병 대령 루이 델그레(Louis Delgrès)는 저항을 호소했고, 수많은 남성과 여성이 무기를 들고 일어섰습니다. 함께 싸우던 연인 사이에서 임신한 몸이었던 솔리튜드 역시 권총을 들고 모든 전투에 참전했으며, 델그레의 연인 마르트로즈(Marthe-Rose) 또한 그와 함께 싸웠습니다.

프랑스군은 곧 저항 세력을 요새 안으로 몰아붙이고 격렬한 포위 공격을 감행했습니다.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루이 델그레는 건물 안에 화약 통을 가득 채웠습니다. 1802년 5월 28일, 프랑스군이 요새에 진입하는 순간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습니다. 요새에 움켜쥐고 버티던 300명의 저항군 가운데 폭발에서 살아남은 이는 극소수였지만, 솔리튜드는 그중 한 명이었습니다. 체포된 그녀는 임신 중이라는 이유로 즉시 처형되지 않았습니다. 한편 섬에서 벌어진 반란 진압은 극도로 유혈적이어서 수천 명의 희생자가 발생했습니다.

최후와 유산

1802년 11월 28일, 솔리튜드는 노예 신분으로 태어나게 될 아들을 낳았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그녀는 다음 날 '고문'당했다고 전해지는데, 이는 처형되었음을 시사하는 표현입니다. 다만 그녀가 실제로 살아남았을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솔리튜드의 이야기는 오늘날까지 기억되고 있습니다. 작가 앙드레 슈바르츠바르(André Schwarz-Bart)는 1972년 그녀의 삶을 소설 『물라토 솔리튜드』로 엮어 널리 알렸으며, 1999년에는 과들루프 레자빔(Les Abymes)에 그녀를 기리는 동상이 세워졌습니다. 자유를 위해 목숨을 내던진 그녀는 지금도 노예제에 맞선 저항의 상징으로 추앙받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