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쿠브 셀라(1787~1860): 갈리치아 봉기를 이끈 농민 지도자

야쿠브 셀라를 묘사한 1848년 목판화
젊은 시절과 군 복무 기피
야쿠브 셀라(Jakub Szela, 1787~1860)는 1846년 갈리치아에서 일어난 농민 봉기의 지도자 중 한 명이다. 그는 타르누프(Tarnów) 근교의 스마조바(Smarzowa) 마을에서 태어났다. 어린 나이에 1805년 군대에 징집된 것으로 추정되며, 고향으로 돌아온 후에는 도끼로 손가락 몇 개를 스스로 잘라냈다. 다시 군 복무에 복귀하지 않기 위해 감행한 의도적인 자해였다. 이 일로 인해 아버지에게 의절당한 것으로 보이며, 가문의 농장은 형제의 소유가 되었다. 셀라는 세 번 결혼했으며, 자신이 속한 지역 농민들의 대표로서 또 다른 대표와 함께 보구시(Bogusz) 가문과 격렬한 분쟁을 벌이기도 했다.
1846년 갈리치아 봉기
1846년이라는 해가 아니었다면 야쿠브 셀라는 역사의 기록에 이름을 남기지 못한 수많은 문맹 농민 중 한 사람으로 잊혔을 것이다. 그해 갈리치아에서는 농노제와 귀족에 맞선 대규모 봉기가 발발했는데, 이른바 '갈리치아 약탈' 또는 '갈리치아 학살'로 알려진 이 사건에서 셀라는 지도자 중 한 명으로 부상했다. 그는 다른 농민들과 함께 숙적이던 보구시 가문을 살해하면서 반란 활동을 시작했다. 반군들은 모든 '주인'과 그들의 관리들을 하나씩 처형해 나갔지만, 제국 관료와 유대인들은 살려두었다. 피비린내 나는 폭력 사태는 수 주간이나 계속되었다.
오스트리아의 음모와 말년
오스트리아는 농민들이 폴란드 귀족에게 맞서도록 성공적으로 선동했다. 이것이 바로 오스트리아가 폴란드 귀족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택한 전략이었다. 이후 오스트리아 군대가 반란에 가담한 마을들을 무력 진압했다. 셀라는 억류되어 2년 동안 타르누프 현수(starost)의 관리 하에 놓였는데, 이것이 오히려 폴란드인들의 보복으로부터 그를 구해준 것으로 보인다. 이후 그는 부코비나(Bukovina)로 강제 이주되었고, 그곳에서 30모르겐, 즉 약 17헥타르의 토지를 하사받았다. 독일계 정착민들 사이에서 생활하며 점차 독일화되었고, 1860년에 생을 마감했다.
양가적 평가
폴란드 문화 속에서 야쿠브 셀라의 인물상은 극명하게 엇갈린 평가를 받는다. 어떤 이들은 그를 배신자이자 살인자로 규정하는 반면, 다른 이들은 억압받는 자들의 권리를 위해 싸운 농민 영웅으로 추앙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