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레게네 카툰(Töregene Khatun)은 몽골 제국의 카툰(군주)으로, 1241년 남편 오고타이 칸이 사망한 뒤부터 5년 후 장남 구유크가 대칸으로 선출될 때까지 제국의 섭정으로서 통치를 이끌었습니다.
카툰이 되기까지
퇴레게네는 1185년경 태어난 나이만(Naiman) 부족 출신입니다. 나이만은 몽골 고원 남서부에 거주하며 튀르크어를 사용하던 몽골계 민족이었습니다. 그녀는 처음에 메르키트(Merkits) 부족의 귀족 쿠두(Qudu)에게 시집갔던 것으로 전해지지만, 1204년 칭기즈칸이 메르키트를 격파하고 몽골 제국에 편입시키면서 그녀의 운명도 크게 바뀌었습니다. 이후 칭기즈칸은 그녀를 자신의 셋째 아들 오고타이(Ögedei)의 아내로 삼게 했습니다. 당시 오고타이에게는 이미 첫 번째 아내가 있었습니다.
오고타이의 첫 아내와 달리 퇴레게네는 다섯 명의 아들을 낳았고, 그중 장남이 남편의 적통 후계자가 되었습니다. 점차 그녀는 오고타이의 다른 아내들을 능가하며 남편과 궁정에 대한 영향력을 넓혀갔습니다. 1229년, 칭기즈칸 사후 2년 만에 열린 쿠릴타이(전체 회의)에서 오고타이가 후계자로 지명되면서 퇴레게네 역시 공식적인 '카툰'의 지위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술을 즐기기로 유명했던 오고타이와 달리, 퇴레게네는 남편 생전부터 이미 정치에 깊이 관여한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그녀는 도교 경전인 도장(道藏)의 재간행을 명령했으며, 관리 임명에도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몽골 제국의 섭정
1241년 오고타이가 사망하자, 후계자를 선출하기 위한 회의를 소집할 책임은 퇴레게네에게 넘어왔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회의를 계속 미루며 스스로 섭정 자리에 올랐습니다. 권력을 잡은 그녀는 남편의 신하들을 해임하거나 심지어 체포하고, 자신의 친척들로 교체했습니다. 가장 가까운 참모로는 칭기즈칸의 원정 당시 포로로 잡힌 타지크 또는 페르시아 출신 여성 파티마(Fatima)를 임명했습니다.
퇴레게네 카툰은 유능하고 의지가 강한 통치자임을 입증했습니다. 몽골의 중국 북부 침공 이후, 그녀는 처음에는 송나라와의 평화 유지를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파견한 평화 사절이 억류되자, 퇴레게네는 1242년 중국 침공을 명령했습니다. 몽골군은 항저우를 함락하고 송나라 영토를 약탈했으며, 결국 송나라가 휴전을 요청하는 사절단을 파견하자 퇴레게네는 이를 수용했습니다.
아들 구유크의 즉위
남성 중심 사회에서 권력을 성공적으로 유지해낸 퇴레게네 카툰은 장남 구유크(Güyük)의 등극을 위해 부단히 노력했습니다. 오고타이는 생전에 다른 아내 사이에서 얻은 아들 코추(Kochu)의 아들, 즉 손자 시레문(Siremun)을 후계자로 지정해 두었습니다. 퇴레게네는 막강한 영향력에도 불구하고 남편의 결정을 바꾸지 못했습니다. 이에 섭정 기간 동안 그녀는 친척과 총신들을 요직에 임명하고, 새 대칸을 선출하는 쿠릴타이 개최를 구유크의 선출이 확실해질 때까지 지연시키는 등 치밀하게 움직였습니다.
1246년, 아들의 집권이 충분히 확보되었다고 판단한 퇴레게네는 마침내 회의를 소집했고, 구유크는 구유크 칸으로 즉위했습니다. 그러나 승계가 완료된 직후 모자 간의 관계는 급격히 악화되었고, 새 대칸은 어머니의 권위를 약화시키려 들었습니다. 구유크의 동생 코덴(Koden)이 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구유크는 어머니에게 파티마가 무술(저주)을 사용했다며 그녀를 넘기라고 명령했습니다. 퇴레게네가 거부하자, 구유크의 부하들은 그녀의 총신이자 참모였던 파티마를 체포해 고문 끝에 살해했습니다.
퇴레게네 카툰 역시 그로부터 1년 반 뒤, 밝혀지지 않은 원인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