락슈미 바이(Lakshmi Bai, 1828~1834년경 출생 – 1858년 몰)는 북인도 잔시(Jhansi) 공국의 여왕(라니)으로, 세포이 항쟁, 곧 인도 독립 전쟁과 영국 식민지 지배에 대한 저항의 영웅이다.
잔시 공국의 병합
락슈미 바이는 1828년과 1834년 사이 어느 해 11월, 갠지스 강의 이름 중 하나인 '마니카르니카(Manikarnika)'라는 이름으로 북인도 바라나시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고위 관료 집안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훌륭한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네 살 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고, 마니카르니카는 아버지가 고문으로 있던 페슈와(재상)의 궁정에서 성장했다. 아버지는 그녀에게 비교적 자유로운 교육을 허했고, 그녀는 형제들과 함께 승마, 활 쏘기, 무기 다루기를 익혔다.
열네 살이 되던 해, 마니카르니카는 마흔대의 잔시 대군주(마하라자) 갱가다르 라오(Gangadhar Rao)와 결혼했다. 그녀는 왕비(라니)가 되었고, 이름을 락슈미 바이로 바꾸었다. 1851년에는 아들을 낳았으나 아이는 석 달 만에 요절했다. 두 해 후, 후계자를 두기 위해 갱가다르 라오는 사촌의 아들 다모다르 라오(Damodar Rao)를 양자로 들여 후계자로 삼았다. 같은 해 라자가 서거했고, 상속인이 미성년자였기 때문에 락슈미 바이가 섭정으로서 국정을 맡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막강한 권력을 쥐고 있던 영국 동인도회사는 다모다르 라오가 라자의 친생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그의 계승권을 인정하지 않았다. 인도 총독 제임스 브룬-램세이(달하우지 후작)는 잔시 공국의 병합을 결정하고, 락슈미 바이에게 연금을 지급하는 조건으로 궁전을 떠날 것을 명령했다.
세포이 항쟁과 최후의 전투
양자가 가문을 계승하는 것이 오래된 전통인 인도에서, 이번 병합은 명백한 불의로 받아들여졌다. 락슈미 바이는 달하우지 총독에게, 그리고 런던 정부에 청원서를 보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이 모두 실패로 돌아가자, 그녀는 무기를 들기로 결심한다.
1857년 봄, 북인도에서 세포이 항쟁이 폭발했다. 1857년 6월 8일, 영국 동인도회사 직원들이 세포이(하급 병사)들에게 살해되는 사건이 벌어졌고, 락슈미 바이가 이 학살의 배후로 지목되었다. 이 사건에서 그녀의 실제 역할은 오늘날까지도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으며, 그녀를 실추시키기 위해 거짓 증언과 문서가 조작되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결국 재판조차 없이 영국 동인도회사는 그녀를 유죄로 판정하고 군대를 일으켰다.
락슈미 바이는 남녀 14,000명으로 구성된 의용군을 규합해 잔시의 성벽을 보강하며 맞섰다. 1858년 3월, 영국군이 도시를 공격하면서 전투는 극도로 처절하게 벌어졌다. 2주간의 포위전 끝에 내부의 배신으로 영국군이 성 안으로 진입했고, 이들은 4일간 약탈과 방화, 학살을 자행했다. 이 응징 작전에서 최소 4천~5천 명의 전사들이 처형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락슈미 바이는 양자 다모다르 라오와 소수의 호위병과 함께 밤사이 도시를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단 하루 만에 사막을 가로질러 150킬로미터를 행군해, 반군 부대가 주둔하던 칼피(Kalpi) 요새에 도착했다. 그녀는 반군 지도자들을 설득해 다시 싸울 것을 촉구했고, 여러 차례 공세를 직접 이끌었다. 반군은 과월리오르(Gwalior)의 도시와 요새를 점령했으나, 1858년 6월 17일 영국군이 도착하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락슈미 바이는 무장하고 남장을 한 채 부대의 선두에 서서 전투에 나섰지만, 이번 포위전은 짧게 끝났고 그녀는 1858년 6월 18일, 스물아홉 살의 나이로 전투 중 장렬히 전사했다.
불멸의 유산
락슈미 바이의 죽음은 인도 저항 운동의 역사에서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남성 중심의 전장에서 여왕으로서 직접 검을 든 그녀의 용맹함은 세월이 흐를수록 전설이 되었고, 오늘날 인도에서는 독립과 자유를 위해 싸운 영웅으로 추앙받으며 수많은 기념비, 동상, 문학 작품 속에 그 이름이 새겨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