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최초의 여성 사립탐정 케이트 워니(1833~1868)는 유명한 핑커톤 탐정사무소의 일원이었으며,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을 겨냥한 볼티모어 암살 음모를 저지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핑커톤 탐정사무소와의 운명적 만남
케이트 워니가 사립탐정이 되기 전 삶에 대해 알려진 것은 많지 않습니다. 그녀는 1833년 미국 뉴욕주 어린(Erin)에서 태어났고, 불과 23세에 남편을 잃고 홀로 빈곤에 시달리는 젊은 미망인이 되었습니다. 한편 몇 해 전인 1850년, 전직 경찰관 앨런 핑커톤은 민간 탐정 및 보안 회사인 '핑커톤 내셔널 탐정사무소'를 설립했습니다. 지역 신문에 실린 광고를 본 케이트는 망설임 없이 사무소 문을 두드리고 앨런 핑커톤에게 직접 일자리를 청했습니다.
케이트가 비서가 아닌 탐정 자리를 원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핑커톤은 놀람을 숨기지 못했습니다. 그는 "우리는 보통 여성 탐정을 고용하지 않습니다"라고 답했습니다. 그러나 케이트는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여성이기에 범죄자들의 아내들과 친분을 쌓아 그들의 신뢰와 비밀을 얻을 수 있으며, 뛰어난 관찰력으로 세부 사항까지 놓치지 않는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녀의 설득에 감복한 핑커톤은 결국 자리를 내주었고, 케이트 워니는 미국 최초의 여성 사립탐정이 되었습니다.
첫 사건, 완벽한 승리
앨런 핑커톤은 저서 『반란의 첩자(The Spy of the Rebellion)』에서 케이트 워니를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위엄 있는 인상에 또렷하고 표현력 있는 이목구비… 날씬하고 갈색 머리의 여성으로, 우아한 몸짓과 침착함을 갖추었다. 용모가 특별히 아름답다고 할 수는 없지만 분명히 지적인 인상이었고… 그 얼굴에는 정직함이 배어 있어, 고통에 처한 사람이라면 누구든 그녀에게 자연스럽게 마음을 열고 싶어질 것이다."
케이트는 빠르게 실력을 증명했습니다. 1858년, 애덤스 익스프레스 회사는 횡령 사건 수사를 위해 핑커톤 사무소에 의뢰합니다. 사건을 맡은 케이트는 주요 용의자인 직원 마로니의 아내와 친분을 쌓았고, 그녀에게서 얻은 정보만으로 부부의 유죄를 입증하는 데 그치지 않고 횡령된 5만 달러 중 4만 달러를 찾아내는 데 성공했습니다.
2년 후인 1860년, 부하의 능력을 확신한 앨런 핑커톤은 사무소 내에 여성 부서를 신설하고 그 책임을 케이트에게 맡겼습니다.
볼티모어 음모, 링컨 암살 기도를 막다
당시 노예제 폐지는 모두의 입에 오르내리던 가장 뜨거운 현안이었습니다. 특히 1860년 11월 에이브러햄 링컨이 미국 대통령으로 선출되면서 긴장감이 크게 고조되었습니다. 메릴랜드의 남부 분리주의 단체들이 철도 공격을 예고하자, 필라델피아·윌밍턴·볼티모어 철도 회사 회장 새뮤얼 H. 펠톤은 핑커톤 사무소에 조사를 의뢰했습니다.
앨런 핑커톤은 요원들을 배치했고, 수집된 정보를 바탕으로 위협이 겉보기보다 심각하며 그 배후가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에게까지 미친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그는 심층 조사와 함께 잠재적 암살 기도에 초점을 맞추는 허가를 받아냈습니다. 케이트 워니는 1861년 2월 분리주의 세력을 조사하기 위해 볼티모어에 파견된 다섯 명의 요원 중 한 명이었습니다. 그녀는 '체리 부인', '바클리 부인' 등의 가명을 쓰며 부유한 남부 동조자로 위장해 분리주의자들과 교류했고, 대통령 암살 음모가 준비되고 있다는 상세한 정보를 보고했습니다.
다른 정보원 역시 볼티모어에서 암살 기도가 있을 수 있음을 확인하면서 대통령은 위협을 진지하게 받아들였습니다. 링컨은 해리즈버그에서의 일정은 유지했지만, 볼티모어를 반드시 거쳐야 하는 워싱턴 귀환 경로의 안전을 핑커톤에게 맡겼습니다. 앨런은 대통령 일정 변경 소식이 새어 나가지 않도록 전신선을 차단했습니다. 링컨은 환자로 변장하고 케이트는 그의 여동생 역할을 맡아 필라델피아행 첫 번째 열차, 볼티모어행 두 번째 열차, 그리고 워싱턴행 세 번째 열차를 탔습니다. 케이트는 대통령을 지키기 위해 긴 여정 내내 잠시도 눈을 붙이지 않았고, 이러한 헌신이 핑커톤의 좌우명 "우리는 잠들지 않는다(We Never Sleep)"의 유래가 되었다고 전해집니다. 링컨은 무사히 워싱턴에 도착했습니다.
그러나 이후 반대파들은 대통령 암살 음모의 실재 여부를 의문시했습니다. 링컨은 그의 행보로 인해 수많은 비판에 직면했는데, 특히 한밤중에 변장하고 도피한 것은 개인적 안전을 위해 명예를 저버린 것이라는 비난을 받았습니다.
남북전쟁과 말년
1861년부터 1865년까지 이어진 남북전쟁 동안 핑커톤 사무소는 북군을 위해 군사 정보 서비스를 구축하는 임무를 맡았습니다. 케이트 워니는 다시금 부유한 남부 여성으로 위장해 분리주의 주들의 사교 모임에 잠입, 최대한 많은 정보를 수집하는 정보 요원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잠입 활동 중에는 때때로 앨런 핑커톤의 아내 역할을 연기하기도 했는데, 일각에서는 두 사람이 연인 관계였을 가능성도 제기됩니다. 리치몬드에서 정체가 발각되어 처형당한 동료 티머시 웹스터와 달리, 케이트는 전쟁을 무사히 넘겼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그녀는 사립탐정 활동을 재개했습니다. 은행 직원 조지 고든 살인 사건을 해결한 것이 대표적인데, 이번에도 용의자 알렉산더 P. 드라이스데일의 아내의 신뢰를 얻어내는 방식이었습니다. 또 다른 사건에서는 암살 기도 관련 정보를 확보하기 위해 점쟁이로 위장하기도 했습니다. 한편 그녀는 핑커톤 사무소 여성 부서의 운영도 계속 맡았습니다.
폐렴을 앓던 케이트 워니는 1868년 1월, 불과 34~35세의 나이로 요절했습니다. 앨런 핑커톤은 그녀에 대해 "내가 보유한 다섯 명의 최고 탐정 중 하나"라고 평가했습니다. 참고로 미국 경찰에 여성이 처음 입사한 것은 그로부터 20여 년 뒤인 1891년의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