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인물

나디라: 코칸트 칸국을 다스린 우즈베크 여류 시인이자 섭정

우즈베크의 여류 시인이자 칸의 아내였던 나디라(1792~1842)는 코칸트 칸국의 섭정으로서 10년간 통치를 이끌었습니다. 그녀는 특히 당대 여성들이 직면한 문제들을 주제로 한 수많은 시를 남겼습니다.

칸의 아내

나디라: 코칸트 칸국을 다스린 우즈베크 여류 시인이자 섭정

나디라 마흘라르아짐(Nadira Mahlar-ajim)은 1792년, 칸(군주) 라흐만쿨베크(Rahmankul-bek)의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총명한 아이였던 그녀는 수준 높은 교육을 받으며 문학, 역사, 철학, 언어를 두루 공부했습니다. 어린 나이에 이미 우즈베크어, 페르시아어, 타지크어로 시를 쓰기 시작했으며, 사용하는 언어에 따라 '나디라', '카밀라', '마크누나' 등 다양한 필명을 사용했습니다.

1810년경 나디라는 오마르 칸과 결혼했습니다. 오마르 칸은 오늘날 우즈베키스탄, 타지키스탄, 키르기스스탄에 걸쳐 있는 영토에 위치한 코칸트 칸국의 지배자였습니다. 그는 전임자이자 형이었던 알림 칸에 대한 음모를 꾸민 뒤 스스로 칸의 칭호를 차지했습니다. 부부 사이에는 두 자녀가 있었고, 결혼 생활은 행복했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시를 깊이 사랑했던 오마르 칸 역시 '아미리'라는 필명으로 작품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시인이자 섭정

1822년 오마르 칸이 세상을 떠나자, 나디라는 '별리의 노래'라는 제목의 연작시를 통해 깊은 슬픔과 애도를 표현했습니다. 장남 무함마드 알리(마다리)가 겨우 열 살 남짓의 소년이었기 때문에, 이후 10년간 나디라가 권력의 계승을 실질적으로 담당했습니다. 지적이고 개방적인 사고방식을 지닌 그녀는 학문을 진흥하고 상업을 보호하며 코칸트 칸국을 예술의 요람으로 만들었습니다. 또한 병원, 카라반사라이(상단 여행자 숙소), 모스크를 건설했으며, 아들이 집권한 뒤에도 그의 고문 역할을 계속 수행했습니다.

통치 업무와 병행하여 나디라는 시 창작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녀의 시는 근본주의자들을 불편하게 만들 만큼 자유롭고 대담한 어조로 쓰였습니다. 작품 속에는 인간적인 사랑과 신비주의적 사랑이 함께 등장하며, 중앙아시아 여성들의 삶과 그들이 안고 있는 문제들도 진솔하게 다루어졌습니다. 그녀가 깊이 공감했던 이러한 주제들은 당시 사회에서는 종종 금기시되곤 했습니다. 그녀는 동양 시의 다양한 형식, 특히 가잘(연애 서정시)을 폭넓게 탐구한 세 권의 디완(시집)에 총 1만 구절을 남겼습니다.

국민적 영웅

즉위한 칸 마다리는 어머니의 길보다는 아버지의 발자취를 따르려 했습니다. 아버지처럼 팽창주의 정책을 추진한 그는 경쟁 관계에 있던 인접 국가인 부하라 에미리트와의 전쟁으로 치달았습니다. 1842년, 에미르 나스룰라 칸이 코칸트 칸국을 침공하여 스스로 통치자로 인정받았고, 마다리와 그의 가족을 포로로 잡았습니다.

나스룰라 칸은 나디라가 지켜보는 앞에서 마다리와 그의 형제를 처형했습니다. 나디라가 공적인 삶을 살며 이슬람의 규율을 어겼다고 비난한 그는 끝내 나디라마저 교수형에 처했습니다. 일설에 따르면 나디라는 그의 청혼을 거절했다고 전해집니다.

나디라는 오늘날까지 우즈베키스탄에서 국민적 영웅이자 순교자로 추앙받고 있습니다. 1991년 독립 이후 이 나라가 발행한 최초의 우표가 바로 그녀에게 헌정된 것입니다.

'별리의 폐허'

아, 갈 곳 잃은 별리(이별)의 폐허 위에 홀로 남은 나,
그대는 내 안식처의 폐허로 오지 않으니,
광야에서 고통받는 그대의 흔적을 찾을 수 없어,
나는 스스로를 바치고 다시 슬픔의 집으로 돌아왔네.
루비빛 그대 입술의 포도주를 나누지 못해
그토록 울었더니, 내 생명력이 피처럼 눈물로 한 방울씩 흘러내렸네.
만났던 그 순간 그 얼굴이 자랑스러웠지만,
황혼은 이별의 불꽃으로 내 몸을 태워버렸네.
내가 미친 사람처럼 굴어도 나를 원망하지 말아다오.
무사(뮤즈)가 내 눈앞에서 사라지고, 그 시선의 빛이 사라졌으니.
나디라, 이 태양의 기적 앞에서 나는 미쳤노라.
내 사랑은 시대의 영광으로 모습을 드러냈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