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브리엘 프티(Gabrielle Petit, 1893~1916)는 제1차 세계대전 중 적십자 간호사로 일하다가 연합군을 위한 스파이로 활약한 벨기에의 저항 운동가입니다. 그녀는 23세의 짧은 생애를 조국 해방을 위해 바친 인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적십자 간호사로서의 시작
노동자의 딸로 태어난 가브리엘 알리나 외젠니 마리 프티는 1893년 2월 20일 벨기에 투르네(Tournai)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녀에게는 헬렌(Hélène)이라는 자매가 있었으며, 어머니가 요절한 후 가브리엘은 브루글레트(Brugelette)에 있는 예수님의 자매회 수녀원에서 성장하며 공부했습니다.
1914년 독일군이 벨기에를 침공하자, 가브리엘은 적십자 간호사로 지원했고 약혼자 모리스 고베르(Maurice Gobert)도 같은 연대에 입대했습니다. 그러나 모리스는 곧 부상을 입고 포로로 잡히게 됩니다. 다행히 그는 탈출에 성공했고, 가브리엘은 약혼자가 네덜란드 국경을 넘어 이자르(Yser) 강 방어선 뒤에 참호를 구축한 벨기에군에 합류할 수 있도록 몰래 도왔습니다.
'에디트 카벨' 저항 네트워크 활동
가브리엘의 용기와 능력을 알아본 영국 비밀정보기관은 그녀를 발탁해 짧은 훈련을 시킨 뒤, 1915년 7월 임무를 위해 브뤼셀로 다시 파견했습니다. 유명한 저항 영웅 에디트 카벨(Edith Cavell)과 연결된 '에디트 카벨' 저항 네트워크의 일원이 된 그녀는 점령지에서 적군의 배치와 이동에 관한 귀중한 정보를 수집해 연합군 참모부에 전달하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그녀는 한 차례 독일 비밀경찰에 체포되어 심문을 받았지만, 결정적인 증거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풀려났습니다. 그러나 가브리엘은 위험을 무릅쓰고 '미스 르그랑(Miss Legrand)'이라는 가명으로 밀정 활동을 계속했습니다.
처형과 불멸의 유산
1916년 1월, 가브리엘 프티는 다시 체포되었고 같은 해 3월 3일 사형 판결을 받았습니다. 그녀는 구명 탄원을 할 기회가 있었음에도 끝까지 거부했으며, 처형 당일에는 눈가리개를 쓰는 것조차 거절하며 군인다운 긍지를 보여주었습니다.
1916년 4월 1일, 가브리엘은 브뤼셀 샤르베이크(Schaerbeek)의 국립 사격장에서 총살형으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향년 23세. 그녀는 마지막 순간 "Vive le Roi!(국왕 만세!)"라는 외침을 끝까지 다 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고 전해집니다.
전쟁이 끝난 후 그녀의 유해는 조국으로 옮겨져 국장으로 재안치되었고, 수많은 벨기에 국민들이 장례식에 참여해 그녀를 추모했습니다. 오늘날 브뤼셀 시청 앞에는 그녀를 기리는 동상이 세워져 있으며, 가브리엘 프티는 벨기에 저항 정신의 상징으로 오랫동안 기억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