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인물

오스카상을 수상한 최초의 흑인 여배우, 해티 맥다니엘

해티 맥다니엘(Hattie McDaniel, 1895~1952)은 미국의 배우이자 가수, 작곡가입니다.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Gone with the Wind)에서 매미 역을 맡아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수상하며, 오스카상을 받은 최초의 흑인 여배우로 역사에 이름을 남겼습니다.

미니스트렐 극단에서 시작된 무대 인생

해티 맥다니엘은 1895년 6월 10일 캔자스주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녀는 전 노예 출신인 수잔 홀버트와 헨리 맥다니엘 부부의 열세 번째 자녀였습니다. 남북전쟁 참전 용사였던 아버지는 전쟁 부상의 후유증에 시달렸고, 종교 음악 가수였던 어머니는 하녀로도 일하며 가족을 부양했습니다.

1900년 맥다니엘 가족은 콜로라도주로 이주했고, 해티는 덴버의 학교에 다녔습니다. 어린 나이부터 교회와 학교, 집안에서 뛰어난 노래 실력으로 주목받았습니다. 1909년에는 학교를 그만두고 오빠 오티스가 이끄는 극단 더 마이티 미니스트렐스(The Mighty Minstrels)에서 노래와 춤을 선보이며 본격적인 무대 경력을 시작했습니다. 1911년에는 피아니스트 하워드 힉먼과 결혼해 여성들만으로 구성된 공연 제작에도 나섰습니다. 그러나 1916년 오빠 오티스가 세상을 떠나면서 극단은 적자를 보기 시작했고, 1922년에는 남편과 아버지를 연달아 잃는 슬픔을 겪었습니다.

'하이햇 해티'

1920년대 초, 해티 맥다니엘은 조지 모리슨의 극단 멜로디 하운즈(Melody Hounds)에 합류해 5년간 미국 전역을 순회 공연했습니다. 이 시기 멜로디 하운즈와 함께 처음으로 라디오에 출연해 두각을 나타냈고, 이후 몇 년간 시카고에서 자신의 곡들을 녹음했습니다. 그러나 1929년 주식 시장 붕괴로 인해 밀워키의 한 클럽에서 웨이트리스와 설거지 일을 하며 생계를 이어가야 했습니다. 사장의 만류를 무릅쓰고 마침내 무대에 설 기회를 얻었고, 1931년에는 로스앤젤레스에 있던 오빠 샘과 언니 에타 곁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오빠 샘의 도움으로 라디오 코너를 맡게 된 해티는 '제 자리를 지킬 줄 모르는' 하녀 캐릭터 '하이햇 해티(Hi-Hat Hattie)'를 연기하며 큰 인기를 얻었습니다. 하지만 턱없이 적은 급여 때문에 현실에서는 여전히 하녀 일을 병행해야 했습니다.

영화 배우로서의 발걸음

1932년 해티 맥다니엘은 영화 더 골든 웨스트(The Golden West)로 스크린에 데뷔했습니다. 이후 크레딧에 이름을 올리지 못한 경우가 많았지만, 하녀나 성가대 가수 등의 단역을 꾸준히 맡으며 경력을 쌓았습니다. 1934년 존 포드 감독의 영화 판사 프리스트(Judge Priest)에서 첫 의미 있는 배역을 맡았고, 이후 클라크 게이블과 함께한 차이나 시스(China Seas), 제임스 스튜어트와 진저 로저스가 출연한 활기찬 숙녀(Vivacious Lady), 헨리 폰다가 출연한 미치지 않고서는(The Mad Miss Manton) 등에 차례로 출연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조앤 크로포드, 탈룰라 뱅크헤드, 베티 데이비스, 셜리 템플 등 할리우드 스타들과 깊은 친분을 쌓았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거듭 맡는 하녀 역할, 그리고 아프리카계 미국인 배우들에게 더 나은 배역을 얻기 위해 업계에 압력을 넣지 않는다는 점은 외부의 비판 대상이 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1938년 하워드 힉먼과 결혼했다가 같은 해 이혼했으며, 이후 1941년 제임스 로이드 크로포드와, 1949년 래리 윌리엄스와 각각 결혼했습니다.

오스카상을 수상한 최초의 흑인 여배우, 해티 맥다니엘

매미 역할과 오스카

1939년 해티 맥다니엘은 대작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스칼렛 오하라의 하녀 '매미' 역을 맡았습니다. 다음 해인 1940년, 이 역할로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수상하며 오스카를 받은 최초의 흑인 여배우가 되었고, 동시에 오스카 후보에 오른 최초의 흑인 배우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흑인 배우들은 영화 초연이 열린 애틀랜타 로우스 그랜드 극장 입장이 허용되지 않았으며, 남부 주에서 진행된 영화 홍보 행사에서도 배제되었습니다. 클라크 게이블은 해티가 초청받지 못하면 초연을 보이콧하겠다고 위협했다고 전해지지만, 해티는 그를 설득해 참석하게 했다고 합니다.

시상식에서 해티는 함께 출연한 다른 배우들과 같은 자리에 앉지 못하고 따로 마련된 테이블에 앉아야 했습니다. 매미 역할과 그녀가 받은 오스카상은 흑인 사회와 백인 사회에서 엇갈린 반응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일부 남부 백인 사회는 매미가 고용주에게 말을 건네는 '친근함'을 문제 삼았습니다. 흑인 사회에서는 흑인 여배우가 오스카를 받은 것을 하나의 승리로 여기는 분위기도 있었지만, 많은 이들은 이 영화가 노예제를 미화한다고 비판했습니다. 당시 오스카상은 할리우드의 인종차별적 고정관념을 받아들이는 사람만이 성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셈이었고, 해티는 문제의 해결책이 아니라 문제의 일부라는 비난까지 듣게 되었습니다.

마지막 무대, '뷸러'

이후 해티 맥다니엘은 1949년 마지막 영화 패밀리 허니문(Family Honeymoon)까지 몇몇 가정부 역할을 계속 맡았습니다. 이후 라디오 코미디 시리즈 뷸러(Beulah)로 방송 활동을 재개했고, 이 프로그램의 TV 각색판에도 출연했습니다. 그녀는 한 시즌 후 고정관념적인 역할에 회의감을 느낀 에델 워터스의 후임으로 합류했습니다. 시리즈는 큰 인기를 얻었지만, 담고 있는 고정관념 때문에 상당한 논란도 낳았습니다. 1952년 봄 유방암 판정을 받은 해티는 더 이상 활동을 이어갈 수 없었고, 루이즈 비버스가 그 자리를 대신했습니다.

해티 맥다니엘은 1952년 10월 26일 5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녀는 커리어 전반에 걸쳐 300편이 넘는 영화에 출연했지만, 크레딧에 이름이 올라간 영화는 80편 정도에 불과했으며, 그중 무려 74개의 역할이 가정부 역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