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리 울스턴크래프트 고드윈(Mary Wollstonecraft Godwin, 1797~1851), 훗날의 메리 셸리는 영국의 작가이자 소설가, 전기 작가, 기행문 작가로, 대표작 『프랑켄슈타인, 또는 현대의 프로메테우스(Frankenstein or the Modern Prometheus)』로 세계 문학사에 이름을 남긴 인물입니다.
퍼시 셸리와의 운명적 만남
메리는 1797년 8월 30일, 페미니즘 철학자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와 정치 사상가 윌리엄 고드윈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태어난 지 열하루 만에 산욕열로 어머니를 잃었고, 아버지 윌리엄은 4년 뒤 두 자녀를 데리고 있는 여성과 재혼했습니다. 메리는 아버지가 직접 가르친 질 높은 교육을 받으며 자랐고, 가정 도서관에서 마음껏 책을 읽으며 집을 찾아오는 지식인들과 교류할 수 있었습니다. 1812년에는 아버지의 권유로 급진주의자 윌리엄 백스터의 가족이 있는 스코틀랜드로 보내졌는데, 메리는 그곳 생활을 즐겼고 이 시기를 통해 글쓰기 재능을 키워나갔습니다.
1814년, 스코틀랜드 여행 사이에 메리는 시인이자 철학자인 퍼시 비시 셸리(Percy Bysshe Shelley)를 만났습니다. 당시 아내 해리엇과 불화 중이던 퍼시는 윌리엄 고드윈의 집을 자주 드나들었고, 메리와 퍼시는 곧 연인 관계로 발전합니다. 아버지 윌리엄은 이 관계를 단호히 반대했지만, 두 사람은 결국 7월에 퍼시의 임신한 아내를 남겨두고 프랑스로 도피합니다. 여행 내내 두 사람은 함께 독서하고 공동 일기를 썼으며, 각자 자신의 창작 활동도 병행했습니다. 그러나 9월,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인해 영국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프랑켄슈타인』의 탄생
영국으로 돌아온 후 상황은 매우 복잡해졌습니다. 메리는 이미 임신한 상태였고, 아버지는 딸을 만나기를 거부했으며, 퍼시는 파산 직전까지 몰려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메리의 의붓언니 클레어 클레어몬트와 함께 런던으로 이주하여 독서와 창작, 지식인들과의 교류를 계속 이어갔습니다.
퍼시가 아내 해리엇 사이에서 얻은 아들의 출생 소식은 메리에게 더욱 잔인하게 다가왔습니다. 메리 역시 딸을 낳았지만, 두 달 일찍 태어난 아기는 출산 직후 세상을 떠났던 것입니다. 극심의 시련을 겪은 메리는 다시 임신하여 조금씩 회복되었고, 1816년 아들 윌리엄을 낳습니다. 같은 해 여름, 시인 로드 바이런(클레어 클레르몽은 그의 아이를 임신한 상태였습니다) 등 친구들과 함께 에라스무스 다윈의 실험 이야기를 나누던 중, 메리는 죽은 물질을 되살릴 수 있다는 주제에서 영감을 얻어 『프랑켄슈타인』의 구상을 시작하게 됩니다.
이후 퍼시와 메리는 배스로 이주했습니다. 12월, 퍼시의 아내 해리엇이 익사한 채 발견되었고, 그녀의 자살은 은폐되었습니다. 퍼시와 메리는 해리엇의 자녀들에 대한 양육권을 얻기 위해 결혼식을 올립니다. 1817년 초여름, 메리 셸리는 『프랑켄슈타인』을 완성했고, 이 책은 익명으로 출간되었습니다. 퍼시가 서문을 쓴 탓에 평론가들은 이 작품을 퍼시의 것으로 추측하기도 했습니다. 같은 해 메리는 딸을 낳았고, 1814년 두 사람이 함께한 여행기를 담은 기행문을 집필했습니다.
연이은 비극과 말년
1818년, 채권자들을 피해 셸리 부부는 클레어 클레르몽과 그녀의 딸을 데리고 이탈리아로 피신합니다. 그러나 이탈리아에서의 삶은 참혹한 비극으로 점철되었습니다. 1818년 딸이, 1819년에는 아들이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메리 셸리는 깊은 우울증에 빠져 남편과 멀어졌고, 오직 글쓰기만이 위안이 되었습니다. 1819년 말 넷째 아이를 낳았지만, 그녀는 평생 다른 세 아이를 애도했다고 전해집니다. 이탈리아에서 셸리 부부는 문학적으로 매우 생산적인 시기를 보냈으나, 1822년 7월 퍼시가 요트 항해 중 실종되었고, 시신은 해안에서 발견되었습니다.
1823년, 메리는 아들 퍼시 플로렌스와 함께 영국으로 돌아와 아버지의 집에 머물렀습니다. 빈곤 속에서, 그리고 퍼시와의 관계를 못마땅히 여기던 지인들의 외면 속에서도 그녀는 강인하게 살아갔습니다. 남편의 시집을 출간하고, 1827년부터 1840년 사이에는 여러 소설을 출간하고 편집했습니다. 그녀는 구혼을 모두 거절하고 오직 아들의 행복과 교육에만 헌신했습니다. 어머니를 깊이 사랑한 퍼시 플로렌스는 어머니와 함께 여행을 다녔고, 1848년 결혼한 후에는 어머니를 자신의 집으로 맞아 모셨습니다.
1839년부터 건강이 악화된 메리 셸리는 병마에 시달리다가, 1851년 2월 1일 5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녀가 남긴 『프랑켄슈타인』은 과학과 윤리, 인간 존재의 의미를 묻는 불멸의 고전으로 오늘날까지도 전 세계 독자들에게 사랑받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