첸슈링(钱秀玲, 1912~2008)은 중국과 벨기에를 잇는 화학자로, 제2차 세계대전 중 한 명의 전쟁 영웅과 무려 97명의 인질을 구해내며 이름을 남긴 인물입니다.
벨기에 유학 시절
첸슈링은 1912년 중국 동부 연안 장쑤성 이싱(宜興)의 부유하고 큰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과학, 특히 화학에 남다른 열정을 보였으며, 언젠가 퀴리 연구소에서 공부해 배운 지식으로 조국 중국에 보답하는 것을 꿈꾸었습니다. 1929년, 17세의 나이에 그녀는 고향을 떠나 벨기에 루뱅 가톨릭대학교에서 화학을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유학 시절 그녀는 벨기에인 의사 그레구아르 드 펄린기(Grégoire de Perlinghi)를 만나 1933년 결혼했습니다. 그러나 일본의 만주 침략과 결혼은 그녀가 중국으로 돌아가려던 계획을 무산시켰고, 부부는 벨기에 남부의 작은 마을 에르브몽(Herbeumont)에 정착했습니다. 1939년에는 파리로 건너가 퀴리 연구소에서 공부하고 싶다는 오랜 꿈을 이루려 했지만, 이미 전쟁 발발로 연구소가 미국으로 옮겨간 뒤라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인질 구출의 영웅
1940년 5월, 한 젊은 벨기에인이 독일 군용열차가 지나는 선로에 폭발물을 설치해 열차를 폭파시켰습니다. 그는 즉시 체포되어 교수형에 처한다는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젊은이를 구하고 싶었던 첸슈링은 자신이 벨기에의 새로운 군정 총독, 독일 장군 알렉산더 폰 팔켄하우젠(Alexander von Falkenhausen)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팔켄하우젠은 1930년대 중국에서 군사 고문으로 활동하며 첸 가문, 특히 사촌인 첸줘룬(錢卓倫) 중장과 깊이 교류했던 인물이었습니다. 첸슈링은 군정 총독에게 젊은이의 목숨을 살려달라고 간청하는 편지를 썼고, 직접 브뤼셀까지 찾아가 손에 들고 전했습니다. 며칠 후, 죄수는 사면되었습니다.
4년 뒤인 1944년, 노르망디 상륙작전 다음 날 저항 운동가들이 벨기에 중부의 에코쉰(Ecaussinnes) 근처에서 게슈타포 장교 3명을 사살하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다음 날 독일군은 젊은 남성 97명을 인질로 체포하고, 주민들에게 범인을 넘기지 않으면 인질들을 처형하겠다고 통보했습니다. 첸슈링은 도움 요청을 받았고, 임신 중인 몸이었음에도 망설임 없이 밤길로 브뤼셀로 향해 팔켄하우젠에게 직접 나섰습니다. 장군으로서는 명령에 불복하는 결과가 되었지만, 그녀의 간곡한 호소에 마음을 움직였고 며칠 뒤 인질들은 모두 석방되었습니다.
이후 팔켄하우젠은 베를린으로 소환되어 불복종의 책임을 물었습니다. 입장이 복잡한 인물이었던 그는 히틀러 암살 음모에 가담했다가 독일 당국에 체포되어 추방당했고, 이후 미군의 전쟁 포로가 되었습니다. 1951년 재판에서 첸슈링은 그를 위해 다시 나섰습니다. 그가 목숨을 구해준 사람들을 모아 변호에 힘을 보태고 집회를 조직하며 그의 무죄를 외쳤습니다.
첸슈링은 2008년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녀는 생전에 벨기에 정부로부터 '1940~1945 인정 메달'을 받았으며, 에코쉰에는 그녀의 이름을 딴 거리가 조성되었습니다. 또한 그녀의 이야기를 담은 소설, 드라마, 다큐멘터리가 잇달아 제작되며 그 업적이 널리 알려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