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인물

가스펠의 여왕 마할리아 잭슨, 노래로 흑인 민권 운동을 이끌다

미국의 가스펠 가수 마할리아 잭슨(Mahalia Jackson, 1911~1972)은 가스펠 음악의 정점에 올라 '가스펠의 여왕(Queen of Gospel)'이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그녀는 동시에 미국 흑인 민권 운동에 깊이 관여하며, 노래로 사회 변화를 외친 인물이기도 합니다.

고단했던 어린 시절

마할리아 잭슨은 1911년 10월 26일 루이지애나주 뉴올리언스에서 이모의 이름을 따 '마할라(Mahala)'라는 이름으로 태어났고, 곧 '헤일리(Halie)'라는 애칭으로 불렸습니다. 그녀는 넉넉지 않지만 정이 많은 대가족 속에서 자랐습니다. 하녀이자 세탁부였던 어머니 찰리티 클라크(Charity Clark), 오빠 루즈벨트(별명 피터), 그리고 여러 이모들과 사촌들이 한집에 살았습니다. 친척까지 합치면 어머니의 여덟 형제자매와 그 자녀들, 아버지 존 A. 잭슨 시니어가 재혼 후 낳은 다섯 아이들까지 포함되는 큰 가족이었습니다.

헤일리가 겨우 네다섯 살이던 무렵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가족들은 그녀를 이모 마할라에게 맡겼는데, 이모는 가문의 실질적인 수장이라는 뜻에서 '듀크(Duke)'라 불렸습니다. 듀크는 아이들을 매우 엄격하게 키웠습니다. 헤일리는 무거운 집안일을 해내지 못하면 구타를 감수해야 했고, 학교에도 제대로 다니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음악'을 부르다

노래를 좋아하던 헤일리에게 유일한 안식처는 그녀가 다니던 침례교회였습니다. 예배 시간에만큼은 마음껏 노래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촌 에드워드가 들려준 마 레이니(Ma Rainey), 매미 스미스(Mamie Smith), 베시 스미스(Bessie Smith) 같은 재즈·블루스 가수들의 음반에 매료되어 따라 부르기를 연습했지만, 가수로서의 첫걸음은 결국 교회에서 내디뎠습니다. 그녀는 훗날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음악을 부릅니다. 그 노래가 나를 자유롭게 느끼게 하고, 희망을 주기 때문입니다."

16세 되던 해, 약 600만 명의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인종차별을 피해 미국 남부를 떠났던 '대이동(Great Migration)'의 물결 속에서 헤일리도 시카고로 이주합니다. 첫 예배에서 즐겨 부르던 곡 'Hand Me Down My Silver Trumpet, Gabriel'을 불러 보인 것이 인연이 되어, 그녀는 곧바로 성가대에 초대받았습니다. 이후에는 존슨 가스펠 싱어스(Johnson Gospel Singers)와 함께 지역 각지의 교회를 돌며 노래하기 시작했습니다.

토머스 도시와의 만남, 첫 녹음

1929년, 헤일리는 '가스펠 음악의 아버지'로 불리는 토머스 A. 도시(Thomas A. Dorsey)를 만났습니다. 도시는 그녀에게 음악적 조언을 해주다가 함께 활동하게 됩니다. 이후 14년간 그녀는 도시가 작곡한 곡들을 예배와 집회에서 불렀습니다. 도시가 작곡한 'Take My Hand, Precious Lord'는 헤일리의 대표곡이자 마틴 루터 킹 주니어가 가장 사랑한 노래가 됩니다. 1931년에는 'You Better Run, Run, Run'으로 첫 녹음을 남겼고, 같은 시기 이름에 'i'를 더해 '마할리아(Mahalia)'로 개명했습니다.

1936년 마할리아는 아이작 L. G. 호켄힐(Isaac Lanes Gray Hockenhull)과 결혼했습니다. 다음 해 두 번째 앨범을 발표했지만, 결혼 생활은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습관적인 도박꾼이었던 남편은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세속 음악을 부르라고 그녀를 몰아붙였습니다. 마할리아는 평생 이를 거부했고, 결국 1941년 이혼을 신청했습니다.

'세계 최고의 가스펠 가수'

1947년, 마할리아 잭슨은 아폴로(Apollo) 레이블과 계약하고 커리어를 일약 폴업시키는 곡들을 발표합니다. 'Move On Up a Little Higher'는 800만 장이 팔리는 기록을 세웠고, 워싱턴의 축구 경기장에서는 'Precious Lord, Take My Hand'를 불렀습니다. 교회보다는 콘서트홀에서, 피아노 반주 대신 오케스트라와 함께 무대에 서는 일이 잦아졌습니다.

이후 그녀가 발표한 곡들은 프랑스에서 노르웨이, 덴마크에 이르기까지 국제적인 명성을 얻게 해주었습니다. 1952년부터 유럽 투어에 나선 마할리아는 '세계 최고의 가스펠 가수', '평화의 천사'라는 찬사를 받았습니다. 과도한 공연 일정으로 지쳐 투어가 중단되기도 했지만, 전체적으로는 큰 성공이었습니다.

1954년에는 컬럼비아 레코드(Columbia Records)와 계약하고 앨범 'The World's Greatest Gospel Singer'를 발표했으며, 1956년에는 'Sweet Little Jesus Boy'와 'Bless This House'를 잇달아 선보였습니다. 성공은 계속 이어져 각종 축제의 개막 무대를 장식했고, 존 F. 케네디 대통령 취임 무도회에서 노래를 부르는 영예도 안았습니다.

민권 운동과 워싱턴 대행진

마할리아 잭슨은 흑인 민권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1956년에는 마틴 루터 킹의 요청으로, 목숨을 위협하는 협박에도 불구하고 몽고메리에서 버스 보이콧 운동 지원 모금 행사에 나서 노래를 불렀습니다. 명성이 인종차별로부터 그녀를 지켜주지는 못했습니다. 시카고에서 집을 사려 할 때는 창문에 총격이 가해졌고, 백인 이웃들은 하나둘 이사를 떠났습니다.

워싱턴에서 열린 직업과 자유를 위한 대행진(March on Washington for Jobs and Freedom)에서도 마할리아는 무대에 올랐습니다. 마틴 루터 킹이 연설하는 동안 그녀는 소리쳤습니다. "마틴, 꿈에 대해 말해요!"(Tell them about the dream, Martin!) 그 순간 목사님은 역사에 남는 그 유명한 연설 'I Have a Dream'(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을 펼쳐냈습니다. 5년 뒤, 그녀는 킹의 장례식에서 그가 가장 사랑하던 곡 'Take My Hand, Precious Lord'를 부르며 그를 배웅했습니다.

"이 나라에서 백인과 흑인을 가르는 증오와 두려움의 벽을 조금이라도 허물고 싶다"는 소망을 품었던 마할리아는 노래뿐 아니라 재정적으로도 민권 운동을 지원했습니다.

말년과 유산

1969년, 마할리아 잭슨은 마지막 앨범 'What The World Needs Now'를 녹음했습니다. 2년 뒤인 1971년, 독일에서 열린 콘서트를 끝으로 사실상 은퇴를 선언하고 공개 석상에 나서는 일을 삼갔습니다. 미국으로 돌아온 그녀는 젊은이들의 학업을 돕는 자선 단체 '마할리아 잭슨 장학재단(Mahalia Jackson Scholarship Foundation)' 설립에 힘썼습니다. 평생 시카고를 사랑한 그녀는 미용실과 꽃집을 차리기도 했습니다.

마할리아 잭슨은 1972년 1월 시카고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시카고와 뉴올리언스 두 도시는 성대한 추모 행사를 열었고, 수만 명이 거리를 행진하며 그녀를 배웅했습니다. 엘라 피츠제럴드(Ella Fitzgerald), 아레사 프랭클린(Aretha Franklin) 등 음악계 거장들도 애도를 표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