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인물

원주민 운동가 펄 깁스(Pearl Gibbs): 호주 원주민 권리를 위해 평생을 바친 투사

호주 원주민 운동가 펄 깁스(Pearl Gibbs, 1901~1983)는 192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호주 원주민의 권리를 옹호하는 데 평생을 바쳤습니다. 그녀는 1938년 '애도의 날(Day of Mourning)' 시위 조직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며 역사에 이름을 남겼습니다.

호주 원주민의 딸로 태어나다

원주민 운동가 펄 깁스(Pearl Gibbs): 호주 원주민 권리를 위해 평생을 바친 투사
펄 깁스 (1901~1983)

펄 깁스는 1901년 시드니 남쪽 라페루즈(La Perouse) 지역에서 메리 마거릿 브라운과 데이비드 배리 사이에서 펄 메리 브라운이라는 이름으로 태어났습니다. 어머니 쪽 혈통으로 원주민이었던 그녀는 언니 올가와 함께 자랐습니다. 당시 호주는 18세기 말 영국 식민지화 이후 1901년 대영제국 자치령인 '오스트레일리아 연방(Commonwealth of Australia)'으로 막 통합된 시기였습니다.

19세기 내내 호주와 태즈메이니아에서 식민지화에 맞선 원주민 저항은 유혈 진압되었고, 보복으로 원주민 남성·여성·아동이 무차별 학살당하는 비극이 반복되었습니다. 20세기 초에도 강력한 인종 분리 정책과 차별이 만연했습니다. 수많은 원주민이 백인이 운영하는 보호구역에 강제 수용되었고, 교육·사법·고용에서 평등한 접근이 차단되었습니다. 혼혈 원주민 아동 다수는 부모로부터 강제로 떨어져 고아원이나 위탁 가정에 맡겨지며 문화와 단절되었습니다. 호주가 1901년 세계 최초로 여성 참정권을 인정했음에도 원주민은 그 대상에서 제외되었습니다.

시드니에서 남서쪽으로 280km 떨어진 야스(Yass)에서 펄과 언니는 백인 전용 공립학교에 다닐 수 없어 분리된 학교로 보내졌습니다. 17세에 학업을 중단하고 시드니로 이주한 펄은 부유층 가정의 하녀로 일하다 영국인 선원과 결혼했으나 나중에 별거하며 세 자녀를 홀로 키우게 되었습니다.

운동가의 길로 들어서다

시드니에서 펄은 '원주민 보호위원회(Aboriginal Protection Board, 일명 원주민 복지위원회)' 위탁으로 가사노동에 동원된 원주민 소녀·여성들을 만났습니다. 이들은 가족과 강제로 떨어진 사연과 열악한 근로 환경을 털어놓았습니다. 펄 자신이 겪은 차별과 이 만남이 그녀의 운동가적 각성을 이끌었습니다. 강제 노동에 시달리는 소녀들의 이야기에 충격받은 그녀는 위원회 앞에서 이들을 변호하기 시작했습니다.

1930년 대공황으로 일자리를 잃은 펄은 어머니와 함께 실업 원주민 노동자 캠프에서 지내며 캠프 운영에 참여했습니다. 이후 시드니 남쪽 170km 떨어진 노라(Nowra)로 이주해 완두콩 수확 일을 하며 왈라가 호수(Lake Wallaga) 원주민들과 교류했습니다. 보호구역의 열악한 근로·생활 환경에 분노한 그녀는 파업과 항의 행동을 조직했습니다.

'애도의 날(Day of Mourning)' - 1938년 1월 26일

1936년 호주 의회가 1909년 '원주민 보호법(Aborigines Protection Act)'을 개정해 원주민 삶을 통제하는 기관의 권한을 강화하자, 이듬해 원주민 지도자 윌리엄 퍼거슨(William Ferguson)이 '원주민 진보협회(Aborigines Progressive Association, APA)'를 결성했습니다. 펄은 창립 초기 멤버이자 가장 열성적인 활동가 중 한 명이었습니다. 퍼거슨과 APA 회장 잭 패튼(Jack Patten)은 펄이 원주민 여성·소녀들과 소통하는 데 최적임자라 판단했고, 그녀는 집회 연설자로 나서 큰 호응을 얻었습니다.

1938년, '퍼스트 플리트(First Fleet)'가 뉴사우스웨일스에 첫 유럽 식민지를 세운 지 150주년이 되는 해였습니다. APA는 이 기념일을 맞아 유럽 식민화 이후 원주민이 겪어온 폭력과 차별을 세상에 알리기로 했습니다. 펄은 1938년 1월 26일 공식 기념식과 병행해 열린 '애도의 날' 시위 조직에 참여했습니다. 행사 전 APA가 배포한 성명서는 다음과 같이 선언했습니다.

"1938년 1월 26일은 호주 원주민에게 축제의 날이 아닙니다. 애도의 날입니다. 소위 150년의 '진보'를 기념하는 이 축제는, 이 땅의 원주민에게 백인 침략자가 가한 150년의 비참과 모욕을 동시에 기념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라디오 연설에 나선 최초의 원주민 여성

이후 빌 퍼거슨과 잭 패튼의 갈등으로 APA가 분열되자, 퍼거슨과 펄은 뉴사우스웨일스 APA를 맡았습니다. 퍼거슨이 회장이 되고 펄은 1940년까지 사무국장을 지냈습니다. 이들은 '원주민 시민권 위원회(Committee for Aboriginal Citizenship)'를 결성해 원주민 시민권 획득을 추진했습니다.

1941년, 퍼거슨의 행보와 운동의 부진에 실망한 펄은 뉴사우스웨일스 포트 켐블라(Port Kembla)로 이주했습니다. 같은 해 그녀는 2WL 라디오 방송국을 통해 연설을 방송한 최초의 원주민 여성이 되었습니다. 철저히 준비된 연설에서 그녀는 원주민의 현실과 시민권 문제를 웅변했습니다.

"내 백성은 백인 남성과 여성의 잔혹함과 불의, 비기독교적 대우를 153년간 강요당해 왔습니다... 우리 소녀들과 소년들은 무자비하게 착취당합니다. (...) 많은 소녀들이 신탁 자금을 돌려받기 어렵습니다. 임금을 한 푼도 받지 못했다는 증언도 있습니다. 백인 아기를 낳고 돌아오는 소녀들도 있습니다. 원주민 복지위원회가 백인 친부의 양육비 책임을 강제한 사례를 단 한 건도 본 적이 없습니다. 그 아이들은 원치 않는 인종에 속한 원치 않는 구성원으로 자라납니다."

'호주 원주민 펠로우십(Australian Aboriginal Fellowship)' 결성

APA 사무국장에서 물러난 후에도 펄은 활동을 이어가 노라 리더(Nowra Leader) 등에 주목받는 기고를 실었습니다. 1946년 뉴사우스웨일스 더보(Dubbo)에서 빌 퍼거슨과 APA 지부를 설립해 1940~50년대 부회장과 사무국장을 맡으며 시민권 투쟁을 지속했습니다. 특히 원주민 소녀들의 가사노동 동원, 학교·병원 분리, 보건·복지 문제 등 여성·아동 이슈에 집중했습니다. 폭넓은 인맥과 협상력으로 최고 결정권자의 문을 두드리며 연대를 넓혔습니다.

1956년, 펄은 원주민 운동가 페이스 밴들러(Faith Bandler)와 함께 '호주 원주민 펠로우십(Australian Aboriginal Fellowship, AAF)'을 공동 창립했습니다. 원주민 정치 단체와 백인 지지자 간 협력을 도모하는 이 기구를 통해 뉴사우스웨일스 전문직 노조들과 동맹을 맺었습니다.

평생을 바친 투쟁의 여정

1962년 '연방 선거법(Commonwealth Electoral Act)' 개정으로 원주민의 연방 선거 유권자 등록과 투표가 가능해졌지만, 실질적 평등은 요원했습니다. 펄은 이후에도 정치적으로 활발히 활동하며 1976년 '원주민 토지권법(Aboriginal Land Rights Act)' 제정으로 이어진 토지 반환 운동에 힘을 보탰습니다. 1983년 신문과의 마지막 인터뷰에서 그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펄은 원주민 토지권이 흑백 공동체가 직면한 문제의 해답 중 하나라고 믿습니다. '무언가 해야 한다'고 그녀는 말했습니다. '호주를 원주민에게 돌려주라'고 말하는 건 답이 아닙니다. 특정 토지는 원주민에게 반환되어야 합니다. 토지권을 쟁취하기까지 많은 세월이 걸릴 것이고, 뉴사우스웨일스 같은 주에서는 험난한 시간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평생을 원주민 권리 투쟁에 바친 펄 깁스는 1983년 4월 더보에서 81세를 일기로 영면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