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인물

린자오(林昭): 중국공산당에 맞선 작가이자 순교자

중국의 여성 문인 린자오(林昭, 1932~1968)는 한때 중국공산당의 열렬한 활동가였으나, 당의 폭정과 부패를 목격한 뒤 끝까지 저항하다 순교한 인물입니다.

열렬한 공산주의 활동가

린자오(林昭): 중국공산당에 맞선 작가이자 순교자

린자오는 본명 펑린자오(彭令昭)로 1931년 12월 16일 중국 동부 쑤저우의 부르주아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16세이던 1947년, 아직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전이던 시절 그녀는 지하 공산주의 조직에 가입해 중화민국 정부의 부패를 비판하는 글을 썼고, 필명으로 '린자오'라는 이름을 사용했습니다. 17세에는 마오쩌둥이 중화인민공화국 건국을 선포하기 약 석 달 전, 집을 떠나 당 저널리즘 학교에 입학했습니다.

1950년 린자오는 토지개혁 운동에 참여했습니다. 이 운동은 지주들을 학살하거나 재산을 몰수하는 방식으로 농민들에게 토지를 재분배한 것으로, 희생자 수는 100만 명에서 300만 명 사이로 추산됩니다. 공식 발표에 따르면 약 3억 명의 농민이 4,700만 헥타르의 토지를 받았다고 합니다. 대의에 헌신하던 린자오는 이 운동에 남다른 열정을 쏟아부었습니다. 서한에서 그녀는 자신이 죽임을 당하는 것도 남을 처형하는 것도 두렵지 않다고 밝혔으며, 고문과 처형 장면에 직접 가담하거나 목격하기도 했습니다.

당의 반대파로 전환

그러나 열렬한 활동가였던 린자오는 점차 당의 반대파로 변모하게 됩니다. 1957년, 당 내 권력 기반이 약화되고 당과 민중 사이 균열이 벌어지자 마오쩌둥은 '백화제방(百花齊放)' 운동을 개시합니다. 겉으로는 언론의 자유와 비판을 장려해 '정풍(整風)' 운동을 추진하겠다는 명분이었지만, 곧바로 비판의 목소리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대대적인 탄압이 뒤따랐습니다. 반우파 투쟁 과정에서 수십만 명의 지식인과 정치적 반대파들이 박해받고 체포되어 유배되거나 처형되었습니다.

당시 베이징대학 중문학과에서 일하던 린자오는 반우파 투쟁의 만행에 맞서 용감하게 항의했습니다. 그 대가로 대학 직위를 잃고 도서관에서 낡은 신문을 분류하는 일을 하게 됩니다. 그곳에서 그녀는 반우파 투쟁의 또 다른 피해자인 간추이(甘粹)를 만나 연인 관계를 맺었습니다. 1959년 간추이는 린자오와 같은 배치를 신청했지만 거부되었고, 대신 노개(勞改, 노동을 통한 재교육) 수용소로 보내져 20년 후에야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대기근과 잡지 『싱훠오』 창간

린자오는 당의 정책에 더욱 강경하게 반대했습니다. 1960년 중국은 대기근에 휩싸여 1,500만 명에서 5,500만 명에 이르는 사망자를 냈습니다. 원인은 전 해 시작된 대약진 운동의 무리한 정책들, 즉 농민들의 철강 생산 강제 동원, 참새 박멸 운동, 밀식 재배, 농업 기술의 무리한 변경 등이었습니다.

같은 해 린자오는 요양 차 상하이에 머물며 다른 반체제 인사들과 함께 잡지 『싱훠오(星火)』를 창간하고, 진행 중인 대기근에 대한 정부의 책임을 강력히 고발했습니다. 같은 해 10월 체포된 그녀는 자신의 말을 철회하기를 거부했고, 징역 20년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감옥 속의 저항

수감 기간 동안 린자오는 구타와 고문에 시달렸지만, 끝까지 신념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잉크도 펜도 없자 머리핀으로 자신의 피를 이용해 글을 쓰기 시작했고, 종이를 확보할 때까지 그러했습니다. 그녀는 감옥에서 겪는 학대를 폭로하고 마오쩌둥의 정책을 비판하며 개혁을 촉구했습니다. 자신의 과거를 돌이켜보며 그녀는 중국공산당이 자신 세대의 이상주의를 악용했다고 통렬히 고발했습니다.

일찍이 1966년, 린자오의 강경한 정치적 태도와 옥중 소요를 빌미로 그녀의 처형을 권고하는 보고서가 제출되었습니다. 1968년 4월, 그녀는 마침내 사형을 선고받았고, 같은 날 처형되었습니다. 어머니와 여동생은 이틀 후에야 그녀의 죽음을 알게 되었는데, 경찰이 처형에 사용된 총탄 값 5자오(半元)를 유족에게 청구하러 찾아왔기 때문입니다.

린자오는 1981년 복권되었으며, 오늘날 널리 순교자로 추앙받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