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격과 비전이 다른 두 지도자
사르다르 파텔과 자와할랄 네루는 인도 국민회의에서 평생을 함께한 동료였습니다. 두 사람 모두 간디지의 측근으로 꼽혔지만, 그 성격과 기질은 하늘과 땅만큼 달랐습니다. 두 사람 모두 영국 유학을 통해 변호사 자격을 취득했지만, 변론 실력에서는 파텔이 네루를 한참 앞섰고, 당시 대영제국 전체 학생 가운데 최고 성적을 거두기도 했습니다.
네루가 '생각하는 사람'이었다면 파텔은 '실행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네루가 샤스트라(고전 학문)의 학자였다면, 파텔은 샤스트라와 니티(정치술)를 모두 아는 현실정치가였습니다. 네루가 연설로 상대를 압박했다면, 파텔은 연설과 더불어 군사력 활용까지 아는 인물이었습니다. 파텔은 네루와 같은 교육을 받았음에도 오만함이 없었습니다. 그는 스스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예술이나 과학이라는 드넓은 하늘을 높이 나는 법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나는 가난한 농부의 밭 흙냄새 속에서, 도시의 좁고 더러운 집들에서 자랐습니다." 반면 네루는 마을의 가난하고 불결한 삶에 짜증을 냈으며, 국제적 명성을 갈망하고 사회주의 총리가 되기를 꿈꾸는 인물이었습니다.
중국과 티베트를 향한 날카로운 경고
1950년 파텔은 네루에게 서신을 보내 중국의 티베트 정책에 대해 경고했습니다. 그는 중국의 태도를 사기적이며 배신적이라 규정하고, 중국을 명백한 '적'으로 지목했습니다. 파텔은 중국의 행동이 예의에 어긋나며, 중국이 보내온 서한의 언어는 '장래의 적'의 언어나 다름없다고 단언했습니다. 또한 중국의 티베트 점령이 새로운 문제들을 양산할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그러나 공산주의에 대한 환상에 빠져 있던 네루는 파텔의 경고를 외면한 채 '힌디-치니 바이바이(인도인과 중국인은 형제)'라는 구호만 내걸었습니다. 그 대가는 뼈아팠습니다. 인도는 1962년 중국의 침공으로 그 후유증을 고스란히 치러야 했습니다. 파텔은 같은 해 네팔 관련 서신에서도 네루의 정책에 대해 강한 불만과 우려를 표명한 바 있습니다.
고아 문제, 단 두 시간이면 충분했다
1950년 고아 독립 문제를 논의하는 내각 회의에서 약 두 시간에 걸친 긴 토론이 이어진 끝에, 파텔은 네루에게 단 한마디를 던졌습니다. "우리가 고아로 가면 되는 일 아닌가? 단 두 시간이면 충분한 문제입니다." 이 발언에 네루는 몹시 분노했습니다. 만약 파텔의 의견이 받아들여졌다면, 고아는 1961년까지 포르투갈의 지배 아래 방치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파키스탄과 분열 세력에 대한 철저한 경계
파텔은 파키스탄의 대리 행위와 적대적 움직임에 늘 경각심을 유지했으며, 네루에게도 분열 세력에 대한 경계를 촉구했습니다. 그는 인도 내 무슬림 리그와 공산주의자들의 분열주의적 성향, 그리고 소련에 대한 그들의 충성심을 정확히 간파하고 있었습니다. 학자들은 파텔을 독일의 비스마르크에 비유했지만, 런던 타임스는 "비스마르크의 성공은 파텔에 비하면 미미하다"라고 평가하기도 했습니다.
만약 네루가 사르다르 파텔의 지침을 따랐더라면, 오늘날의 카슈미르, 중국, 티베트, 네팔 상황은 지금과 같지 않았을 것입니다. 파텔은 진정한 의미에서 마누 법치의 이상을 구현한 인물이었으며, 카우틸야의 외교술과 차트라파티 시바지 마하라지의 원대한 비전을 모두 갖춘 지도자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