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부왕 웨이블의 등장과 인도 문제
1945년 5월, 링리스고우 경을 대신하여 웨이블 경(Lord Wavell)이 인도 총독 겸 부왕으로 부임하면서 인도 문제 해결을 위한 새로운 노력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인도 정세는 여러 세력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어 결코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인도 국민회의는 영국인들이 즉시 인도를 떠날 것을 요구했습니다. 반면 진나가 이끄는 무슬림 연맹은 독립에 앞서 인도를 둘로 분할하고, 무슬림을 위한 별도의 국가 '파키스탄'을 세울 것을 주장했습니다. 또한 빔라오 암베드카르 박사는 독립 인도에서 달리트 계층에게 합당한 지위가 보장되어야 한다고 역설했습니다. 한편 영국은 완전한 독립이 아니라 자치령(Dominion) 지위만 부여하려 했습니다.
자치령 지위를 둘러싼 갈등
여기서 말하는 자치령 지위란, 내정 문제에서는 완전히 독립적이지만 국제적으로는 영국 국왕을 수반으로 하는 영연방(Commonwealth)의 일원으로 남는 체제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인도 국민회의는 이미 1929년 12월 31일 '푸르나 스와라지(완전한 독립)' 결의안을 채택한 바 있었기 때문에, 자치령 지위라는 말만 나오면 격렬하게 반발했습니다. 이처럼 모든 세력이 저마다의 주장에 고집스러웠던 탓에 인도 독립의 길은 좀처럼 열리지 않았습니다.
두 개의 머리를 가진 뱀처럼 행동하던 영국
영국은 마치 두 개의 머리를 가진 뱀처럼 행동하고 있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젊은이들을 헤아릴 수 없이 많이 잃은 데다, 이제는 인도 같은 광대한 나라에 총독이나 장관을 임명할 영국 청년조차 부족한 실정이었습니다. 심지어 젊은 영국인들이 인도로 건너가 통치하던 배에 석탄을 넣을 돈마저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영국은 어떻게든 인도의 독립 문제를 공동체(종교·분파) 갈등과 얽어매려 했습니다. 그래야 몇 년 더 인도를 통치하며 자신들의 궁핍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심라 회의 소집과 지도자들의 석방
임시정부 구성을 논의하기 위해 새 부왕 웨이블은 1945년 6월 25일 심라 회의(Simla Conference)를 소집했습니다. 이에 따라 파텔을 비롯해 수감 중이던 국민회의 지도자들이 모두 석방되었으며, 병환 중이던 간디는 그보다 앞선 1945년 5월 6일에 석방되었습니다.
국민회의는 자신들이 힌두교도와 시크교도, 기타 종교 신자들은 물론 무슬림의 90퍼센트까지 대표한다고 믿었습니다. 반면 무슬림 연맹은 전국 무슬림의 90퍼센트가 연맹을 지지한다고 확신했고, 진나는 "무슬림을 대표할 수 있는 유일한 정당은 무슬림 연맹뿐"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에 대해 간디는 "국민회의는 힌두교도와 무슬림을 모두 대표한다"며 맞섰습니다.
결렬된 회의
간디는 국민회의 대표로 마울라나 아불 칼람 아자드를 심라 회의에 참석시켰습니다. 그러나 진나는 임시정부 내 무슬림 대표는 단 네 명뿐이며, 그 네 명 모두 무슬림 연맹 소속이어야 한다고 강경하게 주장했습니다. 나아가 "국민회의는 힌두교도만 자신의 대표로 삼을 권리가 있을 뿐"이라며 무슬림 의석에 대한 국민회의의 발언권 자체를 부정했습니다.
결국 진나의 완강한 태도 앞에서 심라 회의는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한 채 좌초되고 말았습니다. 인도의 운명을 결정지을 수 있었던 소중한 기회였지만, 무슬림 대표권을 둘러싼 대립은 오히려 이후 인도 분단으로 치닫는 불씨가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