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인물

5. 계승 전쟁 이후의 사와이 자이 싱

5. 계승 전쟁 이후의 사와이 자이 싱

아우랑제브의 죽음과 제위 쟁탈전

1707년 2월 21일, 무굴 제국의 황제 아우랑제브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죽음과 더불어 무굴의 오랜 전통대로 황제의 아들들 사이에서 피로 물든 제위 쟁탈전이 시작되었습니다. 승자는 제위에 오르고 패자는 목숨을 잃어야 하는 냉혹한 싸움이었습니다.

아우랑제브가 죽었을 당시 막내아들은 캄바크시였습니다. 그는 남인도에 자신만의 독립 국가를 세우겠다는 구상을 품고 남방에 조용히 머물러 있었습니다. 한편 장남 무아잠과 차남 아잠 사이에는 격렬한 대결이 벌어졌습니다. 당시 아잠 왕자는 남부에 주둔하고 있었고, 자이 싱은 아잠과 그의 아들 베다르 바크트를 지원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습니다.

반면 암베르의 통치자 자리를 노리던 자이 싱의 동생 비자이 싱(치마지라고도 불림)은 이 분쟁에서 무아잠 편에 섰습니다. 양군은 자자우 평원에서 결정적 전투를 벌였고, 개전 몇 시간 만에 무아잠 군이 우세를 점하는 것이 분명해졌습니다. 이를 본 자이 싱은 아잠 진영을 버리고 천여 명의 병사를 이끌고 무아잠에게 합류했습니다. 전쟁은 아잠과 그의 아들 베다르 바크트의 죽음으로 끝났고, 1707년 6월 65세의 무아잠이 바하두르 샤라는 이름으로 무굴 제위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초반에 아잠을 지원했던 탓에 바하두르 샤 역시 아버지 아우랑제브처럼 자이 싱에게 적대적인 태도를 보였습니다.

자이 싱의 왕위 박탈

즉위하자마자 바하두르 샤는 사와이 자이 싱을 응징하기 위해 암베르로 향했습니다. 그는 악바르가 암베르에 세운 모스크에서 기도(나마즈)를 올리고, 도시의 이름을 '모미나바드'로 바꿔버렸습니다. 아버지보다 한 수 위의 교활함을 지닌 그는 1708년 1월 10일 자이 싱에게서 암베르 왕국을 강탈하고 동생 비자이 싱을 새 왕으로 세워 '미르자 라자' 칭호를 내렸습니다. 자이 싱에게는 다우사의 자기르만이 남았고, 그는 이제 명목상의 무굴 만사브다르에 불과한 신세로 전락했습니다.

이후 바하두르 샤는 하이데라바드 황제를 자칭하며 반기를 든 동생 캄바크시를 토벌하기 위해 남부로 진군했습니다. 암베르 왕국을 되찾고자 했던 사와이 자이 싱도 바하두르 샤를 따라 남하했는데, 황제의 분노가 가라앉으면 왕국을 돌려받으리라 믿었기 때문입니다. 도중에 조드푸르에서 폐위된 후계자 아짓 싱도 자이 싱과 합류했습니다. 메르타에서 두 왕은 바하두르 샤를 알현해 암베르 반환을 간청했지만, 황제는 이를 거절했습니다.

메와르·마르와르·암베르의 연합 전선

자이 싱과 아짓 싱은 만들레스와르까지 바하두르 샤를 따랐지만, 황제로부터 어떠한 확약도 받지 못하자 1708년 4월 21일 조용히 진영을 떠나 메와르의 마하라나 아마르 싱 2세가 있는 우다이푸르로 향했습니다. 이 소식을 접한 바하두르 샤는 마하라나에게 서신을 보내, 두 왕이 궁정에 나와 용서를 빌면 왕국을 돌려주겠다고 제안했습니다. 그러나 세 라지푸트 왕은 무굴에 굴복하기보다 맞서기로 결심했습니다. 자이 싱은 카치와하 공주들을 더 이상 무굴 궁정에 보내지 않겠다는 결의를 굳혔습니다.

세 왕의 연합군은 먼저 조드푸르로 진격해 1708년 7월 아짓 싱에게 조드푸르를 되찾아 주었습니다. 이후 연합군은 암베르로 진군하여 비자이 싱과 무굴 파우즈다르를 격파하고 축출했으며, 사와이 자이 싱을 다시 암베르 왕좌에 앉혔습니다. 메와트의 무굴 수베다르가 며칠간 암베르를 약탈했지만, 자이 싱은 곧 그를 영토 밖으로 몰아냈습니다.

메와르·마르와르·암베르 삼국이 무굴에 공동으로 대항하기로 합의한 이 시기, 마하라나는 상호 관계를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해 딸 찬드라 쿤와리를 자이 싱에게 시집보냈습니다. 이 혼인에는 몇 가지 조건이 붙었습니다. 첫째, 우다이푸르 출신 공주는 나이와 관계없이 모든 왕비 중 으뜸으로 대접받을 것. 둘째, 찬드라 쿤와리의 아들이 왕세자가 될 것. 셋째, 찬드라 쿤와리에게서 태어난 딸은 무슬림에게 시집보내지 않을 것. 자이 싱은 이 조건들을 받아들였고, 이것이 훗날 내전의 씨앗이 됩니다. 조드푸르를 회복한 아짓 싱 역시 딸 수라지 쿤와리를 자이 싱에게 시집보내며 동맹을 강화했습니다. 이후 한동안 이들 국가 간에는 긴밀한 연합이 유지되었습니다. 1708년 10월에는 사이이드 후세인 바라하와 자트족 지도자 추다만이 군대를 이끌고 암베르를 침공했으나, 두 군대 모두 격퇴되어 쫓겨났습니다.

바하두르 샤의 화해 시도

캄바크시 문제를 해결하고 북인도로 돌아온 바하두르 샤는 시크교도들의 반란 소식을 접하게 됩니다. 그는 라지푸트의 협조 없이는 시크 반란을 진압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결국 황제는 사와이 자이 싱을 암베르의 통치자로 공식 인정했지만, 자이 싱은 이에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합당한 만사브(관등)와 무굴 술탄국 내 요직을 원했기 때문입니다. 바하두르 샤는 1712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잔다르 샤와 사와이 자이 싱

바하두르 샤의 뒤를 이은 잔다르 샤(재위 1712~1713년) 역시 자이 싱을 회유하려는 노력을 계속했습니다. 덕분에 이 시기 자이 싱의 삶과 암베르 왕국에는 일단의 평화가 찾아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