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인물

25. 프리트비라지 차우한을 과대 포장하기 위해 민속 문학이 그의 성격을 왜곡했다!

25. 프리트비라지 차우한을 과대 포장하기 위해 민속 문학이 그의 성격을 왜곡했다!

'21번의 승리' 신화는 어디서 왔는가

지난 회차에서 우리는 『프리트비라지 라소(Prithviraj Raso)』에 따르면 프리트비라지 차우한과 무함마드 고리 사이에 21번의 전투가 벌어졌고 그때마다 프리트비라지의 군대가 승리했다는 이야기를 다루었습니다. 서사시 『하미르(Hammir)』는 프리트비라지가 고리를 일곱 번 격파했다고 기술하고 있으며, 『프리트비라지 프라반다(Prithviraj Prabandha)』는 힌두-무슬림 간의 충돌을 여덟 번 언급합니다. 『프라반다 코쉬(Prabandha Kosh)』는 무함마드 고리가 프리트비라지에게 포로로 잡혔다가 풀려난 일을 스무 번이나 이야기하고 있고, 『수르잔 차리트라(Surjan Charitra)』에는 고리의 패배가 21회, 『프라반다 친타마니(Prabandha Chintamani)』에는 23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들 문헌의 기술을 바탕으로 인도에서는 "프리트비라지 차우한이 전장에서 무함마드 고리를 스물한 번 사로잡았지만 살려주었다"는 것이 널리 통용되는 믿음이 되었습니다. 젊은이들의 피를 끓게 하는 감동적인 이야기이기야 하겠지만, 여기에는 역사적 진실이 거의 담겨 있지 않습니다.

『프라반다 코쉬』를 제외한 다른 어떤 문헌도 프리트비라지가 고리를 사로잡아 살려보냈다는 내용을 다루고 있지 않습니다. 각 책들은 단지 고리가 여러 차례 패배했다는 사실만을 언급할 뿐입니다.

유일하게 확인되는 사건, 제1차 타라인 전투

그중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제1차 타라인 전투에서의 고리 패배입니다. 이 전투에서 부상을 입은 무함마드 고리는 라호르로 도주했으나, 시르힌드 요새의 카디 지아우딘(Qazi Ziauddin)에게 붙잡혀 아제르로 압송되었습니다. 카디에게서 많은 금품을 받은 프리트비라지는 고리가 가즈니로 돌아가는 것을 허락했습니다.

아마도 이러한 실제 사건들을 비틀어서 "프리트비라지가 고리를 스물한 번 사로잡고 살려주었다"는 이야기가 널리 퍼지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는 카나이야 랄 세티아(Kanhaiya Lal Sethia)의 시 '헤이 가스 리 로티…'에서 유래한 이야기와 정확히 같은 경우입니다. 그 시를 근거로 "마하라나는 전쟁에서 패배했고 그의 가족은 풀빵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는 말이 퍼졌는데, 이 두 가지 모두 사실이 아닙니다.

흥미로운 역사 영상을 시청해 보세요-

민속 문학이 만든 왜곡, 그리고 그 대가

민속 문학과 낭만적인 이야기가 역사를 지배하여 신화로 만들고, 그 신화를 빌미 삼아 반대 진영은 오히려 역사의 실제 사실마저 부정할 명분을 얻곩니다. 프리트비라지와 무함마드 고리의 경우도 바로 그랬습니다.

프리트비라지 국왕과 관련된 민속 문학은 역사적 사실을 크게 왜곡하여 엄청난 논란을 일으켰고, 그 결과 프리트비라지 차우한의 인물상 자체가 변해버렸습니다. 인도의 위대한 왕이 이 문학 때문에 일부 이데올로기 진영으로부터 "눈앞의 적을 파멸시키는 대신 계속해서 살려주다가 결국 그 적에게 살해당하는" 어리석은 왕으로 낙인찍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평범한 사람이라도 적을 스물한 번이나 살려두지 않을 것입니다. 하물며 그는 방대한 제국의 주인이었고, 정치의 이치를 이해하고 있었으며, 적을 처단하는 법도 알고 있었습니다.

역사적 사실은 단 두 번의 전투뿐

무함마드 고리와 프리트비라지 차우한 사이의 전투는 실제로 단 두 번뿐입니다. 하나는 서기 1189년의 제1차 타라인 전투이고, 다른 하나는 서기 1192년의 제2차 타라인 전투입니다.

『타바카트-이 나시리(Tabaqat-i-Nasiri)』에는 고리가 칸나우지의 자이찬드 왕(Raja Jaichand)과 잠무의 비자이팔(Vijaypal)로부터 군사적 원조를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자이찬드가 이 전쟁에서 무함마드 고리를 도왔다는 이 기록은 다른 어떤 문헌으로도 뒷받침되지 않습니다.

찰루키아 왕조의 '음모'는 있을 수 없는 일

한편 하르빌라스 샤르다(Harbilas Sharda)에 따르면 칸나우지의 가하다발라(Gahadawala) 왕조와 구자라트의 찰루키아(Chaulukya) 왕조가 짐짓 음모를 꾸며 샤하부딘 고리를 불러들여 프리트비라지 차우한을 공격하게 했다고 합니다.

하르빌라스 샤르다는 학식 있는 저술가였으므로 그의 기록에 나름의 근거가 있었겠지만, 구자라트의 찰루키아와 칸나우지의 가하다발라가 함께 모의하여 무함마드 고리를 끌어들여 프리트비라지를 공격하게 했다는 그의 주장은 터무니없이 잘못된 것으로 보입니다.

안힐와라의 찰루키아 왕조에게 더 큰 적은 가즈니와 고르에서 온 무슬림 침략자들이 아니라 차우한 왕조였습니다. 그 이유도 분명합니다. 마흐무드 가즈니는 소므나트를 유린하며 구자라트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고, 무함마드 고리 역시 몇 해 전 구자라트를 공격해 피해를 주려 한 전력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구자라트의 찰루키아가 배교자인 적과 손잡고 같은 신앙을 지닌 적을 멸망시키리라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한쪽은 같은 신앙의 형제요, 다른 한쪽은 배교자였으니까요!

또한 잠무의 왕은 제2차 타라인 전투에서 무함마드 고리 편에 서서 싸우던 프리트비라지 차우한의 봉신의 손에 전장에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사실들을 종합하면, 서기 1192년 무함마드 고리가 인도를 침공했을 때 인도 내 일부 세력의 지원을 받은 것은 사실로 보입니다. 여기에는 펀자브 지역의 무슬림 귀족들과 잠무의 힌두 왕들, 그리고 프리트비라지 차우한 자신의 봉신들까지 포함되어 있었지만, 충분한 증거가 없는 만큼 이를 구자라트의 찰루키아 탓으로 돌릴 수는 없습니다! 자이찬드 가하다발라 관련 에피소드는 다음 회차에서 다루겠습니다.

다음 회차 예고 - 자이찬드 가하다발라는 배신자가 아니었다!


- 모한랄 구프타(Mohanlal Gupta)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