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클로드-빅토르 페랭(일반적으로 '원수 빅토르'로 알려짐)은 프랑스 혁명전쟁부터 나폴레옹 전쟁에 걸친 격동의 시대를 관통한 프랑스의 명장이다. 1764년 로렌 지방 라마르슈 출생인 그는 그르노블 포병 연대에서 드럼 소년으로 군 생활을 시작했으며, 가문의 후광 없이 오직 실력과 무공만으로 제국 원수의 반열에 올라선 인물로 평가받는다.
보나파르트와의 인연, 툴롱 공성전
1793년 툴롱 공성전에 참전한 페랭은 당시 젊은 포병 장교였던 보나파르트 앞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위기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대담하고 과감한 행보는 보나파르트의 깊은 신뢰를 얻었고, 이 인연은 훗날 그의 화려한 군사 경력의 발판이 되었다.
마렝고의 승리를 결정짓다
1800년 마렝고 전투에서 페랭은 오스트리아군의 집중 포화를 끝까지 버텨내며 프랑스군의 전선을 지켜냈다. 이러한 저항이 곧 반격의 기회를 만들었고, 결과적으로 전투의 승패를 좌우하는 결정적 역할을 수행했다. 이 공로를 인정받아 그는 '명예의 검(sabre d'honneur)'을 수여받았으며, 이후 1807년 아일라우 전투 이후 제국 원수로 승진한다.
포로의 위기와 프리틀란트 전투
페랭은 어느 전투에서 포로로 잡히는 불운도 겪었지만, 다행히 적시에 석방되었다. 덕분에 1807년 프리틀란트 전투에서 부상으로 후방에 물러난 베르나도트를 대신해 군단 지휘권을 넘겨받아 나폴레옹의 대승에 일조할 수 있었다.
러시아 원정과 라이프치히
1812년 러시아 원정에는 제9군단 사령관으로 참전하여, 특히 베레지나 강 도하 작전에서 러시아군의 공격을 막아내며 철수하는 대군을 구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813년에는 라이프치히 국민전투에도 참전하여 끝까지 싸웠다.
네 원수 재판과 말년
부르봉 왕정복고 이후인 1815년, 페랭은 동료였던 네 원수의 재판에서 사형에 찬성표를 던졌는데, 이는 오늘날까지 비판받는 논란의 선택으로 남아 있다. 이후 그는 1821년부터 육군장관을 역임하는 등 왕정 하에서도 요직을 맡았으며, 1841년 파리에서 세상을 떠났다. 전설적 원수들의 세대 중 마지막에 가까운 생을 마감한 그의 일대기는, 혁명 시대의 한 소년이 황제의 원수로 성장할 수 있었던 나폴레옹 시대의 상승 기류를 그대로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