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이야기

아쟁쿠르 전투 (1415년 10월 25일): 백년전쟁의 결정적 전환점

1415년 10월 25일, 파드칼레 지방 아쟁쿠르 마을 인근에서 프랑스군과 헨리 5세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이 격돌한 아쟁쿠르 전투는 백년전쟁(1337~1453) 중 가장 유명한 전투 중 하나입니다. 프랑스 기병대는 이곳에서 사상 최대의 패배를 맛보았으며, 기사도적 전쟁의 이상이 무너지면서 프랑스의 존립 자체를 위협하는 불확실한 시대가 열렸습니다. 또한 이 전투는 중세 전쟁사에서 보병이 당대 최강이던 중기병을 압도할 수 있음을 입증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전투의 배경: 분열된 프랑스, 기회 노리는 잉글랜드

1407년 장상공 필리프(Jean sans Peur)의 사주로 루이 도를레앙이 암살된 후, 프랑스는 아르마냐크파와 부르고뉴파의 내전으로 갈기갈기 찢겨 있었습니다. 1413년 카보슈 사건으로 갈등이 극에 달하자, 부르고뉴 공작은 파리에서의 실패 후 잉글랜드와 협상에 나섰습니다. 전년도에는 아르마냐크파가 잉글랜드에 도움을 요청했다가 오세르에서 극적으로 화해하는 등 정국은 극도로 혼란스러웠습니다.

잉글랜드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플랜태저넷 왕조의 리처드 2세와 사촌 랭커스터 공작 헨리 사이의 내전으로 국력이 소진된 상태였습니다. 의회 지지로 1399년 헨리 4세가 즉위했으나, 1411년 아들 헨리 5세가 반기를 드는 등 왕위 계승의 정당성이 흔들렸습니다. 1413년 부왕 사후 왕위에 오른 헨리 5세는 음모를 잠재우고 정통성을 다지기 위해 프랑스와의 전쟁을 재개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는 프랑스 내분 상황을 꿰뚫어 보고 부르고뉴파의 제안을 호의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아쟁쿠르 전투 (1415년 10월 25일): 백년전쟁의 결정적 전환점
헨리 5세, 전쟁을 통해 왕권 강화 도모

1414년, 그는 에드워드 3세의 옛 영유권을 내세워 필리프 2세 오귀스트 이후 잃은 모든 봉토 반환을 요구했습니다. 지나친 요구는 아르마냐크파와 부르고뉴파 양쪽에서 거절당했고, 전쟁은 불가피해졌습니다. 1415년 8월, 헨리 5세는 1만 5천 척의 선박에 1만 병력을 태우고 노르망디에 상륙했습니다. 대군임에도 본격적인 침공엔 부족했고, 장기전엔 부적절한 시기였습니다. 아르플뢰르를 점령한 후 칼레로 향하던 잉글랜드군은 아르투아 지방 아쟁쿠르에서 프랑스군의 차단에 부딪혔습니다.

아쟁쿠르의 병력 비교: 수적 우세 vs 질적 열세

프랑스군은 아르마냐크파 총사령관 샤를 1세 달브레가 지휘했습니다. 내전 탓에 장상공 필리프의 부르고뉴군과 아직 양측을 저울질하던 브르타뉴 공작은 불참했습니다. 현장에 모인 왕족들 사이에서도 전략 이견이 컸습니다. 베리 공작 등 연장자들은 신중론을 폈고, 오를레앙 공작 샤를 등 젊은 귀족들은 강공을 주장했습니다. 결국 베리 공작의 뜻대로 왕과 도팽은 루앙에 남았습니다.

집결한 프랑스군은 약 2만~2만 5천 명으로, 대부분이 기병이었습니다. 총사령관은 제노바 석궁병 지원을 "아군만으로 충분하다"며 거절했습니다. 반면 헨리 5세는 약 7천 명(기사 1천, 장궁병 5천 명 주력)을 거느렸습니다. 수개월 원정으로 지친 잉글랜드군이었지만, 전장을 직접 선택한 프랑스군은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최악의 전장 선택과 배치

아쟁쿠르 전투 전 프랑스의 판단 착오는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적보다 3배 많은 병력을 두 숲 사이의 좁은 지형에 밀집시킴으로써 수적 우위를 스스로 무력화했습니다.

아쟁쿠르 전투 (1415년 10월 25일): 백년전쟁의 결정적 전환점
좁은 전장에서 밀집한 프랑스군 진형

귀족들은 "자신이 선봉에서 적을 짓밟겠다"며 앞다투어 선봉에 섰고, 숙련된 베테랑들은 20여 열의 빽빽한 대형 뒤로 밀려났습니다. 양익은 초반부터 잉글랜드 장궁병을 겨냥한 기병대로 구성되었습니다. 공간 부족으로 궁병과 석궁병을 배제한 채, 총사령관은 그들이 필요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지휘권은 달브레 총사령관과 오를레앙, 알랑송 공작 등 사이에서 불분명하게 나뉘어 있었습니다.

날씨도 프랑스에 불리했습니다. 밤새 비가 내려 이튿날 아침 전장은 걷잡을 수 없는 진창이 되었습니다. 병사들은 갑옷 입은 채 밤을 새웠습니다. 헨리 5세는 크레시 전투의 교훈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는 중앙에 중무장 보병, 양익 전방에 원뿔 진형으로 장궁병을 배치하는 고전적 전술을 구사했습니다.

전투 전개: 진창에 갇힌 프랑스 기병대

최후 협상 결렬 후 오전 10시경 전투가 시작되었습니다. 헨리 5세가 장궁병을 전진시키자 프랑스 기병대가 돌격했습니다. 하지만 진창에 발이 묶인 중기병은 속도를 내지 못한 채 화살 세례를 맞고 쓰러졌습니다. 시체가 쌓여 방벽을 이루자 후속 부대는 지형에 갇혀 옴짝달싹 못 했습니다. 일부 기사들이 접전에 성공해 잉글랜드 보병을 압박했고, 총사령관 달브레가 헨리 5세를 직접 위협하기도 했습니다. 그러자 헨리 5세는 장궁병을 적 측면으로 돌려 백병전을 벌이게 했습니다. 이미 다수 프랑스 귀족이 항복한 상황이었습니다.

아쟁쿠르 전투 (1415년 10월 25일): 백년전쟁의 결정적 전환점
진창 속에서 벌어진 살육전

프랑스군이 2차 돌격을 시도했으나 퇴각하는 1차대와 뒤엉키며 아수라장이 되었습니다. 전투 시작 1시간도 안 된 시점이었습니다. 더 큰 비극은 잉글랜드 진영에서 "프랑스군이 후방을 습격한다"는 소문이 돌면서 벌어졌습니다. 실제론 소규모 역습 시도에 불과했으나, 장상공 필리프의 도착을 두려워한 헨리 5세는 포로 대부분을 학살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장궁병들이 몸값을 노려 항의했음에도). 전장 이탈 전까지 프랑스군 대다수는 적과 제대로 맞붙지도 못했습니다.

참혹한 결과와 정치적 후폭풍

아쟁쿠르 전투 (1415년 10월 25일): 백년전쟁의 결정적 전환점
전장 정리와 약탈

오후가 되어 시체 약탈자들이 지나간 뒤, 프랑스 측 피해는 충격적이었습니다. 브라반트, 알랑송, 바르 공작, 네베르·당마르탱·보쿠르 백작 등 고위 귀족 1,500여 명과 달브레 총사령관 본인이 전사했습니다. 지역 병력 동원 책임자였던 베유(bailiffs) 전원을 포함해 3,000명 이상의 '기타' 전사자가 나왔습니다. 포로 명단은 더 참담했습니다. 오를레앙·부르봉 공작, 부시코 마레샬, 샤를 다르투아, 아르크르 백작 등 거물급이 대거 잡혀 막대한 몸값이 기대되었습니다. 잉글랜드 측 전사자는 300~500명, 기사 10여 명(요크 공작 포함)에 불과했습니다.

양측 모두 신의 심판으로 여긴 이 전투는 전략적 영향이 미미했음에도 정치적·심리적 파장이 컸습니다. 헨리 5세는 승리 후 곧장 잉글랜드로 귀환했습니다.

심각한 여파: 트루아 조약으로 이어진 나비효과

패전 충격으로 생존한 프랑스 왕족들(앙주 공작 등)은 잇달아 별도 강화, 심지어 잉글랜드와 밀약을 맺었습니다. 아르마냐크파가 궤멸적 타격을 입으면서 내전은 악화되었고, 장상공 필리프는 다시 잉글랜드와 협상에 나섰습니다. 프랑스인들 사이엔 "신이 우리를 버렸다"는 자괴감이 퍼졌습니다. 형제살해 내전과 아쟁쿠르의 굴욕이 신의 벌이라는 인식이 지배적이었습니다.

따라서 1415년 10월 25일의 충격은 군사·전략적이라기보다 정치·심리적이었습니다. 1420년 트루아 조약과 프랑스 분할은 아쟁쿠르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다만 이 참패가 기병전이나 기사도 이상을 완전히 끝내진 않았습니다. 프랑스 기병대는 훗날 카스티용 전투(1453)에서 포병 등장 속에서도 일말의 반격을 보여주었고, 1515년 마리냥 전투에서 프랑수아 1세의 돌격은 여전히 기사도 이상에서 영감을 받았습니다.

잉글랜드에게 아쟁쿠르는 헨리 8세와 셰익스피어에게까지 "가장 영광스러운 승리"로 기억되며 모델이 되었습니다.

참고 문헌

  • G. Minois, 『백년전쟁』, Tempus, 2008.
  • C. Gauvard, 『중세 프랑스사: 5세기~15세기』, PUF, 2010.
  • D. Paladilhe, 『아쟁쿠르 전투 - 1415』, Academic Library Perrin, Collection For History,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