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빈 전투는 1214년 7월 27일 프랑스 북부에서 벌어진 결정적인 회전으로, 프랑스 왕 필리프 2세 오귀스트의 군대가 신성로마황제 오토 4세가 이끄는 독일·플란더스 연합군을 격파한 전투입니다. 동맹군의 예상치 못한 패배는 카페 왕조에 대승을 안겨주었고, 왕령 영토를 확장하며 유럽의 경쟁자들에 맞서 왕권을 강화하는 발판이 되었습니다. 부빈은 헤이스팅스 전투처럼 군주가 직접 '신의 심판'을 받는, 즉 피를 흘리며 전장에서 목숨을 걸어야 했던 최초의 전투 중 하나였습니다. 또한 이 승리를 계기로 '민족적 감정'이 형성되었다는 점에서 부빈은 프랑스 역사상 중요한 전환점으로 기록됩니다.
부빈 전투의 배경
십자군에서 돌아온 이후 필리프 2세 오귀스트는 플랜태저넷 가문(리처드 사자심왕, 그 뒤를 이은 존 왕)과의 투쟁을 멈추지 않았고, 정복에 이르는 연속적인 성공을 거두어 왔습니다. 잉글랜드 왕 존의 문제에 독일 제국의 분쟁까지 겹치면서 상황은 프랑스에 유리하게 흘러갔습니다. 1206년 잉글랜드에 성무금지령을 내리고 1209년 헨리 2세의 아들 존을 파문한 교황 인노센트 3세와의 갈등이 그것입니다. 필리프 2세는 이 틈을 활용하기로 결심하고, 아들 루이(훗날 루이 8세)에게 잉글랜드 상륙 작전을 맡겼으나 실패했습니다. 1213년 존은 간신히 교황의 은총을 회복한 뒤 프랑스 왕에 맞서는 동맹을 결성했고, 여기에 불로뉴 백작 르노 드 다마르탱과 플란더스 백작이 된 페랑(포르투갈 출신)의 지지가 더해졌습니다. 한편 오토 4세의 경쟁자인 호엔슈타우펜가의 프리드리히는 카페 왕조의 지원을 받고 있었습니다.
필리프 2세는 1213년 플란더스에서 공세를 개시했습니다. 아들 루이는 잉글랜드군이 라로셸에 상륙해 새로운 전선을 열자 이에 맞섰고, 1214년 7월 2일 라 로슈오무아(La Roche-aux-Moines)에서 프랑스의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북부에서는 연합군이 집결하고 오토 4세가 플란더스에 입성하면서 프랑스 왕의 상황은 한층 긴장되었습니다.
대치한 양측의 전력
이 대결은 여러 면에서 결정적이었습니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당시로서는 드문 일인, 두 군주가 직접 전장에 나섰다는 사실입니다. 군주가 직접 싸워 승리하면 그 정당성이 신의 뜻으로 입증되기 때문입니다.
필리프 2세 역시 결코 가볍게 임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부르고뉴 공작 외드, 기욤 데 바르, 고티에 드 네무르, 상세르 백작 등 명망 높은 기사들과 가신들에 둘러싸여 있었고, 호스피탈 기사단 출신 형제 게랭의 보좌도 받았습니다. 왕실군은 1,300명의 기사와 이에 필적하는 기마 세르잔트를 포함해 약 7,000명의 전투원으로 구성되었습니다. 보병은 평판이 늘 좋지는 않았던 도시 민병대 출신이었습니다. 전군은 성드니의 오리플라메(성기)를 중심에 두고, 삼위일체를 상징하는 세 개의 부대로 편성되었습니다. 전장은 철저히 정찰·경계되어 있었고, 부빈의 다리는 끊어져 있어 프랑스군이 필요시 늪지를 통해 후퇴할 수 있었습니다.
왕실군과 마주한 연합군은 1,500명의 기사와 비슷한 수의 기마 세르잔트를 배치했으며, 보병은 플란더스 민병대와 잉글랜드 용병이 포함되어 다소 더 많았습니다. 오토 4세 외에도 플란더스 백작 페랑, 브라반트 공작, 솔즈베리 백작, 위그 드 보브, 불로뉴 백작 르노 드 다마르탱이 참전했습니다.
부빈 전투의 경과(1214년 7월 27일)
싸움을 연 것은 게랭 형제가 이끄는 프랑스군 우익이었습니다. 부르고뉴인과 샹파뉴인으로 구성된 이 부대는 플란더스 기사들과 그 백작과 맞서 여러 차례의 돌격 끝에 적 전선을 돌파했고, 페랑 백작은 포로로 잡혔습니다. 중앙의 전투는 더욱 치열했습니다. 주력 부대에서는 필리프 2세와 브라운슈바이크의 오토 4세, 두 군주가 정면으로 맞붙었습니다. 보병은 기병의 돌격을 견디지 못하고 곧 혼란스러운 난전에 휘말렸습니다. 필리프 2세는 위기에 처했으나 달려든 기사들 덕분에 간신히 구원되었고, 황제는 도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좌익에서는 로베르 드 드뢰가 르노 드 다마르탱과 맞섰는데, 두 사람은 서로를 잘 아는 사이였습니다. 르노가 가장 오래 저항했으며, 게랭 형제의 지원 끝에 마침내 항복했습니다. 이후 왕실군이 추격전을 벌였으나 브라반트 공작과 오토 4세 본인을 비롯한 대부분의 연합군 지휘관들은 이미 도망친 뒤였습니다. 필리프 2세는 완벽한 승리를 거두고 추격 중지를 명령했으며, 이 대승은 그에게 '오귀스트(아우구스투스)'라는 별명을 안겨주었습니다.
부빈 전투의 결과와 유산
그 결과는 우선 유럽의 세력 균형에서 뚜렷이 드러났습니다. 전투에 불참한 존 왕은 완전히 고립되었고 잉글랜드 왕정의 위기는 더욱 깊어졌습니다. 오토 4세는 훗날 프리드리히 2세가 되는 호엔슈타우펜가와의 권력 다툼에서 결정적으로 약체화되었습니다. 플란더스를 비롯한 대봉건 영주들은 카페 왕조에 굴복해야 했고, 프랑스는 이제 강대국임을 내세우며 지난 몇 년간의 영토 정복을 확정지었습니다.
그러나 그 영향은 프랑스 왕국 내부에서 훨씬 컸습니다. 필리프 2세는 이 승리가 가져올 이점을 빠르게 파악했습니다. 성대한 축제가 열리는 동안 포로들이 공개적으로 전시되었고, 1214년에서 1224년 사이에 지어진 기욤 르 브르통의 1만 구절짜리 『필리피드(Philippide)』를 비롯한 일종의 선전 작품들이 등장해 필리프 2세와 카페 왕조의 영광을 찬양했습니다. 그는 이 승리(그리고 자신)를 중심으로 오늘날의 용어로는 '민족적 감정'이라 할 수 있는 것의 토대를 만들려 했는데, 이는 전투가 지닌 결정적 성격을 잘 보여줍니다.
다만 국왕과 그의 선전가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필리프 2세 생전에 부빈 전투가 끼친 영향은 어느 정도 상대적이었습니다. 그 파장은 루아르 강 이남까지는 미치지 못한 듯하며, 제국에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당시에는 아직 진정한 의미의 '국가적 공명'이 없었던 것입니다.
부빈의 유산이 본격적으로 드러난 것은 특히 19세기, 역사가들이 민족 서사를 만들어야 할 필요성에 따라 이 전투를 프랑스 국가의 탄생일 중 하나로 삼으면서였습니다. 에르네스트 라비스(Ernest Lavisse)는 이렇게 썼습니다. "부빈은 안정된 요람과 함께 우리 조국에 세계적인 인물을 안겨주었다. […] 이 영광은 끊임없이 이어져 우리에게 진정한 프랑스에 왕관을 씌웠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부빈의 기억은 전국적으로 남아야 한다."
참고문헌
- 조르주 디비(Georges Duby), 『부빈의 일요일: 1214년 7월 27일』, NRF, 2005.
- 도미니크 바르텔레미(Dominique Barthélémy), 『부빈 전투(The Battle of Bouvines)』, 페랭(Perrin), 2018.
- 조르주 보르도놉(Georges Bordonove), 『필리프 2세 오귀스트: 정복자(Philippe II Auguste: Le Conquérant)』, 피그말리온(Pygmalion), 20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