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센 주의 주도이자 과거 작센 왕국의 수도였던 드레스덴은 18세기 건축된 수많은 기념비적 건물들로 '엘베 강의 피렌체'라 불리며 독일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 중 하나로 꼽혔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인 1945년 2월, 군사적 가치도 군수 산업도 없는 이 도시는 영국의 대규모 공습으로 완전히 초토화되어 나치 독일에서 가장 파괴된 도시가 되었다. 오늘날까지 드레스덴 폭격이 연합국의 전쟁 범죄로 간주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논쟁이 이어지고 있다.
스바스티카 아래의 드레스덴
드레스덴은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 중 하나로 여겨져 왔다. 작센의 수도이자 열렬한 개신교 도시였던 이곳은 나치 독일의 거점 중 하나였다. 매년 수천 명의 관광객이 찾는 이 도시는 전쟁 대부분 동안 연합군의 폭격 대상에서 제외되어 있었다.
1944년 말이 되자 독일 전역에서 전쟁 패배가 기정사실화되었다. 특히 동부 국경 지대에서는 점점 가까워지는 전선에 공포가 감돌았다. 1944년 말부터 1945년 초까지 동부에서 온 수천 명의 피란민이 독일 중부로 몰려들었고, 드레스덴은 이들을 수용하는 중심지 중 하나가 되었다. 일부는 머물렀지만, 소련군의 진격을 두려워해 더 서쪽으로 이동하는 이들도 수천 명에 달했다.
드레스덴은 피란민의 경유지일 뿐만 아니라, 위태로운 동부 전선을 강화하기 위해 파견된 수만 명의 병력이 통과하는 지점이기도 했다. 시내에는 수많은 야전 병원이 들어섰으나 포화 상태였다. 동부 전선의 참혹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당시까지 연합군 폭격기가 드레스덴을 피해 더 중요한 표적을 노렸기 때문에 많은 시민들은 여전히 안전하다고 느꼈다.
폭격 아래의 드레스덴
1945년 2월, 흑해 연안 얄타에서 미국·영국·소련 정상이 회담했다. 이 회담에서 유럽의 전후 구상뿐 아니라 전쟁을 조기에 끝내기 위한 구체적 목표도 논의되었는데, 그중 하나가 영국의 독일 동부 도시 폭격이었다. 이 폭격으로 민간인 사이에 공포를 조성하고 대규모 피란민 행렬을 유도해 나치 독일의 통신·보급로를 마비시킴으로써 소련의 진격을 돕겠다는 계산이었다. 미국과 소련도 이 계획에 동의했다.
독일 사령부는 드레스덴에 대한 대규모 공습 가능성을 낮게 보았지만, 영국은 곧 도시를 지도에서 지워버릴 작전을 준비했다. '선더클랩 작전(Operation Thunderclap)'이라 명명된 이 임무는 전략 폭격 사령부가 기획했으며, 사령관은 '폭격기 해리스(Bomber Harris)'로 알려진 아서 해리스였다. 그의 지휘 아래 융단 폭격(carpet bombing)이라는 혁신적 기술이 개발·운용되었다.
1942년부터 영국 전략 폭격기 편대는 융단 폭격으로 나치 독일의 도시들을 괴롭혔다. 목표는 엄청난 피해를 입혀 민심을 동요시키고 독일인의 사기를 꺾는 것이었다. 나치가 바르샤바, 로테르담, 코번트리 등에서 비슷한 공습으로 전쟁을 시작했듯, 이제 그들이 그 공격을 고스란히 되돌려받게 된 것이다.
1945년 2월 13일은 드레스덴의 카니발 날이었다. 중세부터 이어진 독일의 대표적 축제인 카니발은 전쟁 중에도 드레스덴에서 열렸다. 시민들은 전쟁과 다가오는 소련군을 잠시 잊으려 했다. 아이들만이 상황을 모른 채 도심 곳곳에서 저마다의 복장으로 뛰놀며 그날을 만끽했다.
같은 날 영국에서는 드레스덴 제1차 폭격 준비가 한창이었다. 전략 폭격 사령부는 수백 대의 폭격기에 각종 폭탄을 탑재해 야간 폭격을 감행하라고 명령했다. 계획은 단순했다: 영국 기지에서 2,700km를 날아 드레스덴에 폭탄을 투하하고 귀환한다.
오후 5시 30분경 이륙 명령이 떨어졌다. 승무원들은 먼저 바다 위를 5시간 비행한 뒤 나치 독일 상공으로 진입했다. 오후 9시 40분 공습 경보가 울렸다. 이전에도 오경보가 잦아 많은 시민이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곧 도시 위로 다가오는 항공기 엔진음이 들리며 상황은 급변했다.
오후 10시 30분경 폭격이 목표에 도달했다. 독일적으로도 상징성이 크고 인구 밀집도 높은 구시가지 중심부가 집중 타격 대상이 되었다. 폭격의 첫 단계는 조명탄 투하였다. 정확한 폭격을 위해 영국 공군은 낙하산이 달린 조명탄을 투하해 목표물을 환히 밝혔다. 표적이 식별되자 본격적인 공격이 시작되었다.
대부분의 시민은 간신히 보강된 지하실로 대피했지만, 제대로 된 방공호는 거의 없었다. 군사적 표적이 아니었기에 나치 정권이 방공호 건설을 불필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파괴와 희생자
오후 10시 3분부터 28분 사이, 500톤의 고폭탄과 374톤의 소이탄이 드레스덴에 쏟아졌다. 25분 만에 1차 공격이 끝났을 때, 불타는 건물들 덕분에 거리는 대낮처럼 밝았다. 역사적 기념물과 주거 건물의 잔해가 화염 속에서 드러났다.
나치 독일의 대부분 도시와 마찬가지로 드레스덴에도 전문 소방대가 없었다. 소방 인력이 징집되어 전선으로 갔기 때문이다. 소방 업무는 노인과 히틀러 유겐트 소년들이 맡았는데, 지연 신관 폭탄 수백 발이 초기 폭격 후 수 분에서 수 시간 뒤 폭발해 진화를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1차 폭격 30분 뒤, 529대의 2차 편대가 독일 영공에 진입했다. 1차의 두 배 규모였다. 조종사들은 항법 장치 없이도 수백 km 밖에서 타오르는 드레스덴의 화염을 보고 목표를 찾을 수 있었다. 965톤의 고폭탄과 800톤 이상의 소이탄이 투하되어 1차 공격의 두 배 위력을 퍼부었다.
공습이 끝난 뒤에도 고통은 계속되었다. 드레스덴은 거대한 화덕이 되어 수 시간 동안 타올랐다. 불타는 건물이 거리와 지하실의 산소를 빨아들여 폭탄을 피한 수백 명이 질식사했다. 지하 은신처에서 탈출하려다 화염에 휩쓸려 사망한 이들도 많았다.
석조 건물, 조약돌 거리, 철골 구조물까지 타버린 사실이 확인된다. 오늘날 인폭탄(린탄) 사용 여부가 논쟁이 되는데, 이것이 아니면 이런 구조물이 타기 어렵기 때문이다. 영국 공군은 부인하지만, 조사 결과는 다르게 나타난다. 확인된 사실은 원시적 네이팜탄, 즉 인과 고무·휘발유를 혼합한 깡통 폭탄이 투하되었다는 점이다. 이 혼합물은 쉽게 타오를 뿐 아니라 모든 표면에 스며들어 연소를 지속시켰다.
14일 아침, 최악은 끝난 듯 보였다. 그러나 300대 이상의 미군 B-17 폭격기가 3차 공격을 위해 드레스덴으로 향하고 있었다. 임무는 아직 서 있는 모든 것을 파괴해 작업을 마무리하는 것이었다. 이 공격으로 475톤의 고폭탄과 396톤의 소이탄이 추가 투하되었다.
3차 공격 당시 수백 명의 시민이 엘베 강변에 피신해 있었다. 다수의 목격자에 따르면 몇몇 전투기가 저공 비행을 하며 기관총으로 피란민을 사격했다. 그러나 미 공군 공식 문서에는 이에 대한 기록이 없고, 호위 전투기 조종사들도 이를 부인하고 있다.
오늘날까지 드레스덴 폭격의 정확한 희생자 수는 알 수 없다. 엄청난 파괴와 전염병 예방을 위한 시신 신속 화장, 수만 명의 피란민이 공식 기록 없이 도시에 머물렀던 사실 등이 추정을 어렵게 만든다. 공식 집계는 약 3만 5천 명 수준이나, 일부 연구는 최대 30만 명까지 추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