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이야기

크라크 데 슈발리에에서 영감을 받은 유럽의 성, 샤토 가야르

크라크 데 슈발리에에서 영감을 받은 유럽의 성, 샤토 가야르

얼마 전 '역사 속 산책' 시리즈에서 제3차 십자군 원정의 이야기를 다루며, 중세를 대표하는 두 기사 살라딘과 사자심왕 리처드의 대결로 마무리한 바 있습니다. 오늘 소개할 글은 그 이야기의 자연스러운 연장선에 놓여 있습니다. 리처드 1세가 예루살렘 탈환에 실패하고, 동맹이자 최대 숙적이었던 프랑스 국왕 필리프 2세가 유럽에서 일으키는 문제에 직면하여 동방을 떠난 사건만 기억하면 충분합니다.

리처드 1세는 잉글랜드로 돌아오는 데 무려 2년이라는 세월이 걸렸습니다. 귀국길에 오스트리아를 지나던 중, 그 나라의 군주 레오폴트 5세가 사촌인 몽페라의 콘라트 죽음에 대한 책임을 물어 그를 체포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어머니이자 위대한 여인 아키텐의 엘레오노르가 감금자들이 요구한 막중한 몸값을 마련해 준 덕분에 겨우 석방될 수 있었습니다. 1194년 봄, 그는 드디어 잉글랜드에 돌아왔고, 시선은 이미 숙적 프랑스를 향하고 있었습니다.

샤토 가야르(Château Gaillard)의 건설

크라크 데 슈발리에에서 영감을 받은 유럽의 성, 샤토 가야르

12세기 말 프랑스 지도

12세기 말 프랑크 왕국의 정치적 복잡성을 이해하려면 당시 프랑스 지도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언뜻 보면 오늘날 프랑스 영토가 수많은 백작령과 공작령으로 나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파리 주변의 푸른색 지역은 프랑크 왕의 후계자인 카페 왕조가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유일한 영토였습니다. 하지만 우리 이야기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노르망디 공국의 상황입니다. 당시 사자심왕 리처드는 잉글랜드의 국왕인 동시에 노르망디 백작이었고, 이 땅을 절대 내주지 않을 작정이었습니다.

노르망디의 유리한 위치는 필리프 2세에게 달콤한 유혹이었습니다. 프랑스 영토를 확장하려면 바다로 통하는 길이 반드시 필요했는데, 그 최선의 통로가 바로 센 강이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곳, 작은 어촌 마을 레상들리(Les Andelys) 옆에 리처드 1세는 이러한 확장을 저지하기 위해 가야르 성의 축조를 명합니다.

크라크 데 슈발리에에서 영감을 받은 유럽의 성, 샤토 가야르

가야르 성에서 바라본 풍경

성은 단 2년 만인 1195년부터 1197년 사이에 완공되었으며, 일부 추산에 따르면 잉글랜드 왕실에 결코 적지 않은 2만 파운드의 비용이 들었다고 합니다. 건축에 관한 공식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정확한 설계자는 알 수 없지만, 시리아의 여러 십자군 성들을 방문하며 눈여겨본 사자심왕 리처드 본인이 직접 지휘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지배적입니다. 여기에는 유명한 크라크 데 슈발리에(Krak des Chevaliers) 성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크라크 데 슈발리에에서 영감을 받은 유럽의 성, 샤토 가야르

오늘날의 가야르 성

크라크 데 슈발리에에서 영감을 받은 유럽의 성, 샤토 가야르

1900년경 가야르 성의 모습

크라크 데 슈발리에처럼 가야르 성 역시 동심원 형태의 방어선, 즉 세 겹의 방벽을 갖추었습니다. 성 내부에는 왕의 거처로 사용될 거대한 주탑이 세워졌고, 그 주변으로는 장기간의 포위 공격에 버틸 수 있도록 병력 유지에 필요한 마굿간, 작업장, 창고 등의 건물들이 배치되었습니다. 오각형 모양의 외벽에는 다섯 개의 방어탑이 세워졌는데, 여기에는 시리아에서 가져온 새로운 기술인 '머키콜레이션(machicolation)'이 처음으로 적용되었습니다. 이는 성벽 위에서 돌이나 끓는 물을 수직으로 떨어뜨려 성벽을 오르려는 적을 공격할 수 있게 하는 구조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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캉 성에서 볼 수 있는 머키콜레이션의 예

가야르 성은 센 강 방어의 핵심 시설이었지만 유일한 시설은 아니었습니다. 굽이진 강 건너편에는 또 하나의 작은 요새가 있었고, 두 요새 사이에는 선박의 진입을 차단하기 위해 올렸다 내릴 수 있는 쇠사슬 그물이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리처드 1세의 죽음과 가야르 성의 상실

사자심왕 리처드는 가야르 성에 머문 시간이 길지 않았습니다. 1199년 봄, 전쟁에서 전쟁으로 인생을 보내기로 다짐한 그의 불같은 성격이 다시 드러납니다. 리모주의 자작 에마르 5세가 샤뤼 샤브롤 성에 근거를 잡자, 리처드는 어머니 엘레오노르의 아키텐 공국 영지를 보호하기 위해 직접 진군합니다. 자작의 병력이 소수였기 때문에 포위전은 쉬워 보였지만, 잉글랜드 국왕은 필요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밤, 그는 호위단과 함께 평소 입던 사슬 갑옷 없이 포위전 경과를 살피러 나섰고, 불행하게도 한 발의 화살이 방어되지 않은 어깨에 꽂히고 말았습니다. 중세 전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부상이었지만, 이 화살은 그의 몸에 심각한 감염을 일으켰고 며칠 후 그는 세상을 떠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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퐁트브로 수도원에 잠든 사자심왕 리처드

리처드 1세의 왕위 계승 문제는 결국 잉글랜드 왕국에 큰 대가를 안겨줍니다. 브르타뉴의 아르튀르 1세는 리처드가 스스로 후계자로 지명한 인물이었지만, 제3차 십자군 원정 말기 리처드가 동방에 머무는 동안 이 브르타뉴 백작은 프랑스 국왕 쪽으로 기울어 있었습니다. 결국 어머니 아키텐의 엘레오노르의 지지를 등에 업은 존 1세가 잉글랜드 왕으로 즉위했고, 그의 첫 번째 과제 중 하나는 경쟁자를 제거하는 일이었습니다. 아르튀르 1세가 죽은 정확한 이유는 밝혀져 있지 않지만, 그의 죽음 위에는 늘 존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습니다.

건립 8세기 이후의 가야르 성

이야기를 시작하며 가야르 성을 크라크 데 슈발리에 성과 비교했다는 점을 기억합시다. 시리아 전쟁 이후 크라크 데 슈발리에의 현재 상태는 확인하기 어렵지만, 이 전쟁 이전까지 그곳은 세계에서 가장 잘 보존된 중세 성으로 꼽혔습니다. 안타깝게도 이는 오늘의 주인공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가야르 성은 백년전쟁의 최전선에서 그 격변을 지켜본 목격자였습니다. 전쟁 중 성은 수차례 프랑스와 잉글랜드의 손을 오갔고, 파괴와 재건축의 반복 속에 점점 훼손되어 갔습니다. 1599년, 즉 백년전쟁이 끝난 지 약 1세기 반이 지난 시점에 프랑스 국왕 앙리 4세는 수선 비용이 너무 많이 든다는 이유로 성의 철거를 명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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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르 성의 다른 모습들

철거는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았고, 1862년부터 가야르 성은 프랑스의 역사 기념물로 지정되었습니다. 여름철에는 중앙의 주탑을 견학할 수 있으며, 나머지 언덕은 자유롭게 거닐며 센 강의 절경과 함께 사자심왕 리처드가 세운 십자군 성이 지녔던 거대한 규모를 실감할 수 있는 공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