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이야기

보코 하람의 폭력은 왜 나이지리아 북부에서 시작되었나

1년 전, 이슬람 무장단체 보코 하람(Boko Haram)이 나이지리아 북부에서 여학생 276명을 납치했습니다. 당시 굿럭 조너선(Goodluck Jonathan) 대통령은 이들을 구하기 위한 뚜렷한 조처를 내놓지 않았고, 결국 3월 말 대선에서 그 대가를 치렀습니다. 북부 유권자들은 이슬람교도인 전직 장군 무함마두 부하리(Muhammadu Buhari)에게 표를 몰아주었죠.


그렇다면 나이지리아 남북의 분열은 어떻게 생겨났으며, 이것이 보코 하람의 폭력과 어떤 관련이 있을까요?


나이지리아 북부는 가난하고 이슬람교도가 많은 반면, 남부는 상대적으로 번영했고 기독교 신앙을 따르며 인구의 교육 수준도 높습니다. 북부에서 보코 하람은 아이들을 납치해 전투원과 성노예로 만들고, 여성들에게 자살 폭탄 테러를 강요했으며, 수많은 민간인을 살해하고 마을을 약탈했습니다. 하지만 왜 하필 북부였을까요? 네덜란드 라이덴 대학에서 나이지리아 분쟁을 연구하는 다비드 에르하르트(David Ehrhardt) 연구원에게 그 배경을 물었습니다.


에르하르트는 "보코 하람의 폭력은 무슬림 인구가 많은 북부에서 벌어졌는데, 남부 출신 기독교인인 조너선 대통령은 이 문제를 외면했다"며 "극북 지역 상황을 실질적으로 개선할 정치적 의지가 부재했고, 조너선은 보코 하람 소탕뿐 아니라 부정부패 척결에서도 실패했다"고 말합니다. 정부의 소극적 태도에는 종교뿐 아니라 민족 문제, 그리고 영국 제국주의가 남긴 유산까지 얽혀 있습니다.


목자와 상인, 두 개의 뿌리


무슬림 북부와 기독교 남부의 차이는 수백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오늘날까지도 중요한 변수로 작용합니다. 핵심은 종교보다 오히려 민족적 기원입니다. '올바른' 민족 집단에 속해야 토지, 자원, 권력에 접근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북부의 주요 민족은 무슬림 하우사(Hausa)족과 풀베(Fulbe)족입니다. 이들은 본래 12~13세기경 나이지리아로 이주해 온 사람들로, 풀베족은 유목 목축민, 하우사족은 상인이었습니다. 하우사족은 무역 도시들을 건설하며 소금, 금, 노예 무역에 대한 통제력을 키워 나갔고, 이슬람과 함께 북아프리카 및 중동의 문화와 사상을 나이지리아로 전파했습니다. 18세기까지 이 과정은 대체로 평화롭게 진행되었지만, 칼리프국의 등장으로 국면이 바뀌게 됩니다.


1804년, 풀베 출신 성직자 셰후 우스만 단 포디오(Shehu Usman dan Fodio)가 북부 지역 무슬림들의 신앙을 정화한다는 명분으로 지하드(성전)를 선포했습니다. 이 지하드로 당시 지배층이던 하우사 엘리트가 무너졌고, 풀베 부족 출신 에미르(왕후)들이 그 자리를 대신했습니다. 이렇게 1808년 소코토 칼리프국(Sokoto Caliphate)이 세워졌습니다.


칼리프국에는 풀베족과 하우사족 외에도 수많은 민족이 살고 있었습니다. 새 국가의 응집력을 높이기 위해 에미르들은 공통의 이슬람 문화를 추구하며 샤리아(이슬람법)를 도입했고, 그 집행은 사우디아라비아를 제외한 어느 곳보다 엄격했습니다. 동시에 하우사 문화의 다양한 요소도 받아들이면서 하우사-풀베 혼합 정체성이 형성되었습니다. 칼리프국은 번영을 누렸지만, 지배층은 다른 민족들을 억압했습니다. 군대는 변경 지역을 약탈하고 주민들을 노예로 팔아넘겼습니다.


샤리아를 지켜 준 영국 식민 지배자


한 세기 뒤 영국이 등장하면서 많은 것이 바뀌었지만, 그것은 제국주의자들의 본래 의도는 아니었습니다. 영국은 직접 통치 대신 순종적인 현지 대리인을 통해 조세를 걷고 인구를 관리하는 간접 통치를 선택했습니다. 칼리프국은 유지하되 칼리프만 갈아치운 방식이었습니다. 1903년 영국은 도피 중이던 초대 칼리프 아타히루 1세(Attahiru I)를 살해했고, 이로써 칼리프국의 정치적 역할은 끝났지만 기존 통치 구조는 영국에 유용했기에 종교적 역할은 그대로 남았습니다.


영국은 선교사들도 함께 데려왔습니다. 남부 해안 도시들은 이미 15세기 포르투갈이 무역 거점을 세우면서 기독교와 접촉해 있었습니다. 영국 선교사들은 이곳 남부에 학교를 세우고 주민들에게 서구식 교육을 가르쳤습니다. 반면 북부는 칼리프국 관할 지역이라, 무슬림 주민들의 반발을 우려한 영국은 선교사들의 북부 진출을 금지했습니다.


그 결과 북부 주민들은 주로 이슬람 교육을 받았고 서구의 기술 혁신에 대해 거의 배울 기회가 없었습니다. 유럽의 눈으로 볼 때 북부는 점차 뒤처졌고, 경제를 이끌 지식이 결여되었습니다. 영국이 건설한 철도는 북부 농업지대의 판매권을 넓혀 주었지만, 농업 노동을 찾는 기독교 신앙의 남부인들도 끌어들였습니다. 종교적으로 큰 갈등은 없었고 모두가 평화롭게 나란히 살았지만, 원주민들은 스스로를 '사회적으로 열위에 있는' 이주민들과 구분했습니다. 이 구분 의식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독립이 드러낸 남북의 균열


영국은 민족적·종교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나이지리아의 여러 지역을 한 나라로 묶었습니다. 북부에는 샤리아를 유지하되 민사 분야로만 적용 범위를 제한했습니다. 그러나 독립(1960년)을 앞두고서는 종교가 혼재된 사회의 모든 시민의 권리와 충돌한다는 이유로 샤리아를 완전히 폐지했습니다.


영국이 떠난 뒤 남긴 권력 공백은 심각한 결과를 낳았습니다. 독립 초기 나이지리아 공화국은 지역 간 치열한 경쟁으로 특징지어졌고, 정치 지도자들은 중앙과 지방 행정에서 자기 민족을 우대했습니다. 북부에서는 교육 수준이 높은 남부 출신 이주민이 일자리를 모두 가져갈까 두려워했습니다. 동시에 북부 주민들은 칼리프국을 자신들의 문화적·종교적 유산으로 여기며, 영국에 의해 무너지고 샤리마마저 폐지된 현실에 분노했습니다. 결국 군사력이 강한 북부가 권력을 장악했고, 1999년까지 여러 장군들이 쿠데타와 유혈 사태, 내전 속에 집권했습니다. 새로 당선된 부하리 대통령 역시 1983년 장군 신분으로 잠시 권력을 잡았던 인물입니다.


1960년대 말 니저 델타에서 석유가 발견되면서 남부의 번영이 가속화되었고, 북부와의 격차는 더욱 벌어졌습니다. 국내외 기업들은 남부에 투자를 몰았고, 산업 기반이 없는 저숙련 북부의 경제는 급격히 악화되었습니다. 방대한 공무원 조직을 둔 국가가 북부에서 최대 고용주로 떠오른 것도 이 때문입니다.


공무원들의 부정부패는 극에 달했습니다. 그들은 토지와 중앙 정부에서 배정받은 석유 수익을 배분할 권한을 쥐고 있었습니다. 인구는 급속히 늘었고 특히 청년들이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몰려들면서 빈민가가 버섯처럼 생겨났습니다. 당국은 빈민가를 통제할 능력이 없었고, 1990년대 말에는 민족 집단 간, 기독교인과 무슬림 간 범죄와 사회적 긴장이 급격히 고조되었습니다. 정치인들은 언론의 힘을 빌려 이 갈등을 자신의 이익을 위해 부추겼고, '우리 대 그들'이라는 감정은 갈수록 깊어졌습니다.


보코 하람의 등장


모든 것이 삐걱거리던 곳, 특히 북부 나이지리아에서 변화의 움직임이 나타났습니다. 1970년대 말, 이슬람 개혁주의자들은 순수한 이슬람의 회복, 즉 샤리아의 재도입과 이슬람 국가 건설이 해결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당시 정치·종교 지도층에 대한 불만이 컸던 북부에서 이들은 많은 지지를 얻었고, 샤리아는 만연한 부정부패에 맞서는 무기로 여겨졌습니다.


보코 하람은 문자 그대로 '서구식 교육 금지'를 뜻하는 이름으로, 21세기 초 무슬림 공동체 안에서 순수 이슬람을 알리던 평화로운 운동으로 출발했습니다. 급진 지도자 모하메드 유수프(Mohammed Yusuf)는 북동부 실업 청년들을 중심으로 빠르게 지지 세력을 넓혔습니다. 그는 정치를 통해 샤리아를 더 확대 적용하려 했지만, 정치인들의 약속은 결국 허사였습니다. 2004년 경찰과의 유혈 충돌 이후 보코 하람은 무장 투쟁에 나섰고, 2009년 정보기관이 유수프를 사살하면서 단체는 더욱 급진화해 지하로 잠복했습니다. 에르하르트에 따르면 오늘날 이 운동은 주로 용병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무슬림과 기독교인 할 것 없이 모든 주민이 피해자가 된 만큼 주민들 사이에서 정당성이나 지지는 거의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최근 2년간 폭력은 더욱 격화되어 수천 명이 목숨을 잃었고, 100만 명이 넘는 나이지리아인이 고향을 떠났습니다. 이제는 피해자의 종교나 민족이 더 이상 중요하지 않습니다. 현 지도자 아부바카르 셰카우(Abubakar Shekau)는 새로운 이슬람 국가라는 꿈을 실현하기 위해 최근 IS(이슬람국가)에 대한 충성을 맹세했습니다.


에르하르트는 "조너선 대통령은 임기(2010~2015) 동안 군의 무기와 훈련에 소홀했다"며 "병사들은 보코 하람과 싸우는 것을 두려워해 반란까지 일으켰다"고 지적합니다. 그러면서 "올해 초부터는 같은 위협에 시달리던 이웃나라 카메룬과 차드의 훈련 잘 된 군대의 도움으로 진전이 있었다. 보코 하람은 후퇴했지만 아직 완전히 격파된 것은 아니다"라고 덧붙입니다.


이제 북부 나이지리아인들의 희망은 새 대통령 부하리에게 실려 있습니다. 과연 그가 보코 하람을 격파하고 부정부패를 끝내는 강한 지도자가 될지는 미래가 증명해 줄 것입니다. 나이지리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누가 권력을 쥐느냐이기 때문입니다. 권력자가 땅과 일자리, 부를 나누고, 신앙은 그다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