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이야기

불교 수도원(비하라)의 탄생과 라자스탄에 남은 불교의 흔적

불교 수도원(비하라)의 탄생과 라자스탄에 남은 불교의 흔적

마하트마 붓다의 가르침에 감화받은 수많은 사람들이 비구로 출가하여 불교 승가(僧伽)에 합류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고대 인도의 차투르아쉬람 체계에 큰 충격을 안겨주었는데, 남녀가 젊은 나이에 속세를 떠나 스님의 가사를 입고 비하라(수도원)에서 새 삶을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왕, 상인(세레슈티), 일반 가정주들은 불교 수도원에 아낌없이 기부했고, 덕분에 전국 각지의 도시에 웅장한 비하라들이 잇달아 세워졌습니다.

이 비하라들은 아차리야(阿闍梨)와 우파디야야가 가르치는 중요한 교육의 중심지이기도 했습니다. 아리안족 전통의 구루쿨(아차리야 쿨)의 자리는 이제 비하라가 대신하게 되었습니다. 고대의 구루쿨은 하나의 가족처럼 운영되어 사제 간에 부자(父子)와 같은 정을 나눌 수 있었지만, 불교 수도원에서는 그럴 수 없었습니다. 그곳에서 교육받는 승려와 학생의 수가 수백 명, 나아가 수천 명에 이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흥미롭게도 승려들은 생계를 위해 탁발을 나설 필요조차 없었습니다. 불교 수도원은 대개 막대한 재산을 소유한 부유한 기관이었기 때문입니다.

비하라에서 학생들은 공동체 생활을 영위했으며, 교육을 위해 다수의 우파디야야와 교사들이 임명되었습니다. 그들은 반드시 『비나야 피타카』, 즉 율장에 기록된 규율을 준수해야 했습니다. 바로 이러한 체계 속에서 날란다와 비크람실라 대학, 스라바스티와 발라비 비하라가 크게 번영했습니다. 규모의 대소를 불문하고 불교 교육기관의 전체 운영은 불교 승려들의 손에 맡겨져 있었습니다. 상가, 비하라, 대학의 관리 업무는 승가 구성원들의 투표로 선출된 저명한 학자의 지휘 아래 수행되었으며, 이러한 관리자는 지식과 학문 면에서 모범이 되는 인물이었습니다. 원래 하나의 불교 상가에 불과했던 날란다는 훗날 세계적인 교육기관으로서 명성을 얻게 됩니다.

라자스탄의 불교

마하트마 붓다는 생전에 라자스탄 지역을 직접 방문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마가다의 일부 마우리아 왕들이 불교를 받아들이면서 불교는 마가다에서 탁실라, 카불, 칸다하르를 거쳐 카피리스탄(박트리아)에 이르기까지 전파되었고, 따라서 이 경로상에 있는 라자스탄에도 불교가 자연스럽게 뿌리내렸습니다. 라자스탄에서의 불교는 마우리아 제국의 흥기(기원전 4세기)부터 굽타 제국의 몰락(5세기경)까지 존재했던 것으로 추정되며, 이 시기는 다소 앞당기거나 늦출 수도 있습니다.

라자스탄의 불교 기념물

마하트마 붓다의 입멸 후 그의 사리를 담아 인도 전역에 8만 4천 개의 스투파(탑)가 세워졌는데, 그중 일부는 라자스탄에도 건립되었습니다. 이후에도 수많은 불교 사원, 수도원, 석굴, 찰리야 등이 세워졌고, 시대에 따라 수많은 비문과 명문(銘文)도 남겨졌습니다. 오늘날 라자스탄에서 온전한 형태의 스투파는 발견되지 않지만, 세 곳의 유적지에서 불교 스투파의 잔존 흔적이 확인되었습니다.

라자스탄의 여러 유적지에서 진행된 고고학적 발굴에서는 부처상이 출토되었고, 여러 곳에서 주목할 만한 고대 불교 기념물, 석굴, 비석이 발견되었습니다. 불교 승려들이 사용하던 그릇 파편 역시 대량으로 출토되었습니다. 이러한 고고학적 자료들은 현재 각지의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이를 통해 당시 라자스탄 사람들에게 불교가 미친 영향이 매우 광범위하고 깊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아쇼카 시대의 유적

라자스탄에서 마우리아 문명의 가장 오래된 유물은 바이라트(Bairath)에서 발견되었으며, 이 때문에 이 지역의 문화는 '바이라트 문명'이라고도 불립니다. 바이라트는 자이푸르에서 북쪽으로 약 75km 떨어진 곳, 붉은빛의 아라발리 구릉지대에 둘러싸인 원형 계곡 한가운데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 구릉지대는 동(銅) 산지로 유명하며, 그중에서도 비마의 둥그리(Bhimji ki Dungri), 가네시기리 동굴, 비잭의 언덕이 특히 잘 알려져 있습니다. 비라트나가르는 마하바라타 시대에도 이름난 곳이었는데, 판두 왕의 아들들이 유랑 생활의 마지막 해를 이곳에서 신분을 숨긴 채 보냈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이 일대에서는 방대한 양의 고고학적 자료가 출토되었습니다.

바브루 비문

비라트나가르의 바브루 언덕에서는 마우리아 황제 아쇼카의 비문이 발견되었으며, 이 비문은 서기 1840년 버트 대위에 의해 발굴된 뒤 벵골 아시아 협회(칼커타)로 옮겨졌습니다. 석판화는 키토이 대위가 제작했습니다. 이 비문이 특별한 이유는, 아쇼카의 대부분의 칙령이 석주(石柱)에 새겨진 것과 달리 바브루 비문은 암반 위의 바위판에 새겨져 있다는 점입니다.

이 비문에서 아쇼카는 『무니 숫타』, 『슈레나가트 바야니』, 『웁파티페히』, 『라훌로바다 숫타』 등 일곱 불교 경전에서 발췌한 일곱 개의 설법 구절을 골라, 비구와 사문들이 학습하고 사색하도록 권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이 언덕에는 사람이 살지 않지만, 당시 이 일대에는 수많은 불교 승려들이 거주했을 것이며, 바로 그렇기에 이 비문이 이곳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빔지의 둥그리 비문

바이라트에서 북동쪽으로 약 1.5km 떨어진 빔지의 둥그리 아래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비문이 새겨져 있습니다. 이 비문은 룹나트(사사람, 비하르)의 비문을 바이라트판으로 옮긴 것으로 볼 수 있으며, 1871~72년 칼라일에 의해 발견되었습니다. 발굴된 구획은 높이 17피트, 서에서 동으로 24피트, 남북으로는 15피트에 달하며, 불러 박사와 세나르트가 내용을 편집했습니다. 이 비문에서 아쇼카는 초기에는 불교를 적극적으로 장려하는 데 큰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음을 솔직히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는 상가에 귀입한 지 1년 만에 불교 포교를 시작했다고 밝혔습니다. 종교 진흥을 위해 진심으로 기울인 노력은 결코 헛되지 않으며, 그 결실은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누구에게나 똑같이 돌아간다는 것이 그의 믿음이었습니다. 이 비문에서 아쇼카는 자신의 종교가 국가의 구석구석까지 전해지기를 희망하며, 이를 위해 신하들에게도 적극적인 협력을 당부했습니다.

두 단계로 나뉜 유적

비잭의 언덕과 빔지의 둥그리 비문을 연구한 고고학자 다야람 사흐니는 이 일대의 토루 발굴을 결정했습니다. 약 20~25피트 깊이까지 발굴하자 불교 관련 유물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약 27피트 아래에서는 찰리야(불교 사원)의 유적이 확인되었습니다. 놀랍게도 두 단계의 유적은 계단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어, 당시 이곳이 체계적인 종교 공간으로 조성되었음을 보여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