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이야기

제51장: 인도 문화에 미친 서양의 영향

서론: 인도 문화의 이중적 특성과 서양의 도래

인도의 민족주의는 서양 교육이라는 어머니에게서 자양분을 얻으며 태동했습니다. 베다 시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인도 문화는 이방인들로부터 크나큰 충격을 받아왔습니다. 인도 문화에는 두 가지 두드러진 특징이 있습니다.

  • 외유내강(外柔內剛)의 자세: 겉으로는 매우 강고하여 타문화의 폐단이 내부로 침투하는 것을 막아 자멸을 방지했습니다.
  • 내유외강(內柔外剛)의 포용성: 내면으로는 관용의 유연함을 지녀 외래 문화의 장점을 흡수·융합하며 스스로를 발전시켰습니다.

이러한 특성 덕분에 사카, 쿠샨, 후나, 팔라바, 이슬람 문화의 침략 속에서도 인도 문화는 투쟁으로 멸망하거나 항복으로 정체성을 상실하지 않고 고유한 색채를 유지하며 외래 문화를 인도화할 수 있었습니다.

서양 문화의 의미

인도에서 말하는 '서양 문화'란 유럽 여러 나라의 문화를 지칭합니다. 이 문화는 기원전 1000년경 그리스와 로마에서 싹터 지속적인 발전을 거쳐 근대 유럽 문화로 꽃피웠습니다.

인도 문화와 외국과의 접촉사

인도의 대외 접촉은 베다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아프가니스탄, 이란, 이라크, 아시리아 등 서쪽 지역과 스리랑카, 태국, 인도네시아, 캄보디아, 베트남 등 동남아시아 일대에서 베다 시대의 흔적이 발견됩니다. 당시 유럽, 아메리카, 아프리카, 호주 대륙의 주민들은 아직 미개 상태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포르투갈 문화의 상륙

인도 문화와 서양 문화의 본격적인 조우는 15세기 말, 1498년 바스코 다 가마가 인도로 항로를 개척하며 포르투갈 상인들이 발을 들인 시점으로 봅니다. 이들은 인도 여성과 결혼하여 '고아니(Goani)'라 불리는 혼혈 자녀를 낳았습니다.

초기 포르투갈인들은 가톨릭 포교에 주력했습니다. 이들과의 접촉으로 '방(room)', '경매(auction)', '성직자(clergy)', '식탁(table)', '셔츠(shirt)' 등 다수의 포르투갈어 차용어가 인도 언어에 스며들었고, 고아 지역에서는 포르투갈어의 변형된 새 언어가 탄생하기도 했습니다.

기타 유럽 국가들의 문화 유입

포르투갈에 이어 네덜란드(홀란드)의 네덜란드인, 영국의 영국인, 프랑스의 프랑스인 상인들이 차례로 인도에 진출했습니다. 네덜란드인은 무역과 거점 확보에 주력했으며, 1608년 영국 동인도 회사가 인도에 진출했을 때 영국은 엘리자베스 1세, 인도는 무굴 황제 자한기르 치세였습니다.

1615년 영국 사신 토머스 로가 자한기르 알현을 통해 통상 특권을 얻었고, 1644년 프랑스 상인들이 도착하면서 영·프 간 상업·정치적 경쟁이 격화되었습니다. 1760년 완디와시 전투에서 프랑스 세력이 패퇴하고, 1765년 박사르 전투와 알라하바드 조약을 거쳐 영국이 인도의 실질적 지배자로 부상했습니다.

이 시기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 문화가 인도 각지에 영향을 미쳤으나, 영국 지배가 공고해지며 유럽 문화가 인도 문화에 단단히 뿌리내렸습니다. 영국은 강제 개종이나 국교 제정은 하지 않았으나, 식생활·주거·복장·결혼·축제 등 영국인의 관습이 인도인들에게 깊숙이 스며들었습니다.

서양 문화 전파의 주요 수단

1. 영어 교육의 보급

영국 세력 확립 이전 인도 교육은 미미했으나, 지배 계층의 상위 카스트 힌두교도와 무슬림은 각자 종교적 영향 아래 자녀를 교육시켰습니다. 본격적인 서양 교육은 윌리엄 벤팅크 총독 시절(1828~1835) 시작되었습니다.

인도 서양 교육의 아버지라 불리는 맥컬리 경은 영어를 매개로 인도인 마음에 영국적 사고를 심어 영국 우월성을 주입하려 했습니다. 하딩 총독 때 맥컬리가 새 교육 과정을 마련했고, 영어 교육의 확산으로 인도의 고전적 전통과 제도가 쇠퇴하며 서구적 개인주의가 싹텄습니다. 이로 인해 인도 전통적 사회생활의 특징이 점차 잊혀졌습니다.

영어 교육은 도시-농촌, 빈부, 유무식 계층 간 사상적 간극을 심화시켰습니다. 영어 교육을 받은 청년들의 식사·복장·인사·담화법에 서양 문화가 입혀졌고, 영어·영어 교육·영어 사상이 인도 청년들을 지배했습니다. 선교 학교에 영국인 목사들이 배치되어 이곳 출신 청년들은 인도 문화를 비판하고 기독교를 찬양하는 세력이 되었습니다.

2. 교통 수단의 발달

1857년 제1차 인도 독립 전쟁(세포이 항쟁) 이후 철도와 도로가 급속히 확충되어 군대와 물자의 신속한 이동이 가능해졌습니다. 수운과 항공 운송도 뒤따라 발전했습니다.

교통망 확대로 인도산 원료가 영국으로, 영국산 완제품이 인도로 대량 유통되며 인도인 생활에 물질적 경향이 퍼졌습니다. 많은 인도인이 사회적 금기를 깨고 유럽으로 이주해 호화로운 생활에 젖어들었으며, 도덕과 정의보다 편의 추구에 몰두하게 되었습니다. 부유층 및 서구 교육 청년들 사이에서 유럽 여성과의 결혼이 유행하며 유럽 여성들이 인도인의 생활양식·복장·식습관을 급격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3. 기독교 포교 활동

영국인 교사와 목사들은 힌두교를 낙후된 것으로 폄하하고 기독교의 우월성을 설파했습니다. 통치층의 생활양식이 인도인들을 유혹하자 다수가 개종하여 영국인처럼 살려 했습니다. 인도 정부는 선교사들에게 여러 특혜를 베풀었고, 선박과 군대 막사에 '목사 중위(pastor lieutenant)'와 '선교 대령(Missionary Colonel)'을 두어 인도 병사들을 개종시켰습니다. 개종 병사에게는 진급과 고액 급여가 주어졌고, 관립 학교에 성경 교육이 의무화되었습니다.

선교 학교에서 기독교가 가르쳐졌고, 많은 선교사들이 병원 운영으로 신임을 얻어 실업자·기근 피해자·수감자·고아 등에게 갖가지 유인책을 제시하며 개종시켰습니다. 이처럼 영국 문명이 급속히 퍼지며 인도 문화는 모욕과 폄하를 당했습니다.

4. 관직 유혹

영국 정부는 개종자와 영어 학습자에게 관직을 제공했고, 영어를 공용어로 선포했습니다. 이로 인해 영어 교육 청년들의 취업길이 열리며 교육 기관에서 영어 비중이 커졌습니다. 관직 생활 중 영국인 상관과의 접촉으로 인도 청년들의 생활양식에 영국풍이 배어들었고, 바지·코트·넥타이·모자가 정장이 되었으며 식탁 의자 문화가 정착되었습니다.

5. 서구 국가들과의 직접 접촉

많은 인도 왕족과 부유층 자제들이 유럽을 드나들며 고등 교육을 받고, 상인들의 왕래가 잦아졌습니다. 이로 인해 인도 상류·지식층이 영국 문물을 가까이서 접하며 자국 언어·의복·음식·의례를 천시하게 되었습니다.

6. 산업 발전

산업화로 인도에 자본가 계급이 대두했습니다. 이들은 영국인 사이에서 입지를 넓히려 서구 생활양식을 모방했고, 사무실에 고가 서양 가구·소파·커튼·화병을 들였으며 영국인 장교 부인들에게 뇌물성 선물을 제공해 '뇌물로 일 처리하는 문화'를 낳았습니다.

촌락민들이 공장 노동자로 도시로 몰려들며 고용주의 서구적 생활에 영향을 받아 복장이 바뀌고, 캔틴에서 차·커피·담배·술 등을 소비했습니다. 귀향 시 이를 과시하며 마을에도 도시 모방 풍조가 퍼져, 서양 문화가 우리 삶의 전 방위를 뒤흔들며 인도 사회에 대변혁을 초래했습니다.

사회적 영향

계급 제도(카스트)에 미친 영향

영국이 카스트 제도를 직접 폐지하려 하진 않았으나, 일자리·무역·교육 등으로 고향을 떠나 타지에서 생활하게 되자 카스트 제도가 자연스레 느슨해졌습니다. 서구 사상은 모든 인도인을 동등한 선상에 놓았고, 영어 교육으로 인해 사람을 카스트가 아닌 지능·능력·지식·재산으로 평가하게 되었습니다.

불가촉천민 제도(터치어빌리티)에 미친 영향

상위 카스트 인도인은 타 카스트 사람의 손이 닿은 음식을 피했으나, 점차 호텔에서 타인이 만든 차·비스킷·소다·술 등을 거리낌 없이 섭취하고 약물도 복용하게 되었습니다. 호텔 종업원은 주로 하위 카스트였으나 전 카스트인이 함께 식사했습니다. 열차·트램·버스에서 전 카스트가 동승했고, 영국 이전 각 카스트별 우물·연못이 수도 시설로 대체되며 힌두·무슬림·시크·기독교도·하리잔 등 모든 카스트가 같은 물을 쓰게 되었습니다. 힌두 신상도 같은 물로 목욕시켰습니다. 이 모든 것이 불가촉천민 의식을 완화시켰습니다.

식생활에 미친 영향

인도인은 식문화에서 가장 보수적이었으나, 유럽인이 들여온 감자·토마토 등을 브라만도 기피하다가 영국인과 접촉하며 호텔에서 차·커피·비스킷·빵(더블 로티)·오믈렛 등을 무분별하게 즐기게 되었습니다. 오믈렛은 도시 중산층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혼인 관계에 미친 영향

20세기 초 인도 사회 개혁가들이 이종교·이카스트 혼인을 장려했으나 당시엔 큰 성과를 못 냈습니다. 학자들은 현대 이카스트 혼인이 서구 문명의 영향이라 봅니다. 남녀공학·함께 놀이·사무실 동료로 일하며 자연스럽게 이카스트 혼인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파르다(베일/은거) 제도에 미친 영향

영국 도래 전 파르다 제도가 극성에 달했으나, 영국 여성들이 자유로운 복장을 즐기자 인도 소녀들도 유럽 여성 복장을 모방했습니다. 이 과정은 도시에서 더 빨라 도시의 파르다 제도는 사실상 소멸했습니다.

대가족 제도의 해체

고대 아리아인이 만든 대가족 제도는 농업과 가내 수공업 덕에 실용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영국 통치 아래 교육받은 청년들이 관청과 민간 기업 취직을 위해 고향을 떠나며 가족을 동반하자 대가족 제도 해체가 시작되었습니다. 인도인 사이에서도 공동체 의식 대신 서구적 개인주의가 싹텄습니다.

종교적 영향

서양 교육으로 우리 종교 신념에 혁명적 변화가 일었습니다. 기독교 교사와 전도사들은 힌두교를 조롱하고, 힌두교 내 소외된 하위 카스트 가문들에게 평등을 미끼로 개종시켰습니다. 다수의 교육받고 부유한 이들도 영국인들과 교분을 쌓으려 개종했습니다.

서양 문화의 개방성에 영향을 받은 많은 힌두교도가 힌두교 종교 관습에 반발했습니다. 벵골의 유명 인사들이 개종하고 수천 명의 인도인이 기독교를 수용하며 힌두교와 인도 문화의 존립이 위협받자, 인도 지성인들이 반격에 나섰습니다. 라자 람 모한 라이, 케샤브 찬드라 센, 스와미 다야난다 사라스와티, 스와미 라마크리슈나 파라마한사, 스와미 비베카난다 등 사상가들이 힌두교 내부 개혁을 주도하며 인도인들에게 종교·영적 유산에 대한 신념·열정·자긍심을 심어주었습니다. 이들의 개혁 운동으로 교육받은 힌두 사회에서 미신·주술이 이성과 지식으로 대체되었습니다.

종교를 뒤덮던 위선과 외식의 껍질이 벗겨지자 진정한 종교를 알고자 하는 열망이 일었고, 인도인들은 자국 종교에 대한 믿음과 경외심을 회복했습니다.

경제적 영향

서구 문명과 문화가 인도 경제 민생에 미친 영향은 가장 컸습니다. 영국 도래 전 인도의 가내 수공업은 번영하고 자급자족했으며, 그 산물은 내수 충족을 넘어 수출되어 금과 은을 벌어들였습니다. 그러나 영국은 인도인의 산업을 파괴하고 강제로 속박된 노동자로 전락시켰으며, 닐(쪽) 재배 같은 강제 노역에 내몰았습니다.

회사의 '구마슈타(징세 대리인)'의 횡포와 인도인 대상 비인도적 착취는 당대 영국 관료들의 보고서와 일기에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영국은 자국 이익을 위해 인도인을 비인도적으로 경제 착취했습니다. 인도산 원료를 영국으로, 영국 공장산 완제품을 인도로 유입시키는 정책을 폈고, 기계제품이 수공예품보다 싸서 대중이 기계제품을 선호하자 가내 공업, 특히 직물 산업의 척추가 부러졌습니다. 존 설리번은 영국 경제 정책을 "우리의 제도는 갠지스 강변의 모든 좋은 것을 빨아들여 템스 강변에 짜내는 해면과 같다."고 신랄히 비판했습니다.

산업 붕괴로 실업자가 농업으로 몰리며 농업 인구 과밀화와 1인당 소득 감소를 초래했습니다. 영국은 농업 상업화를 강요해 농민이 지역 수요 대신 영국 회사 수요에 맞춰 작물을 재배하게 했고, 지역 식량 부족으로 물가가 치솟았습니다. 일부 지역에선 사탕수수·목화·닐만 재배되어 기근과 아사 사태가 빚어졌습니다. 1876~78년 남인도 대기근 와중에도 690만 파운드 상당 곡물이 영국으로 수출되었고, 인도 노동자·농민·빈민이 굶주려 죽어갔습니다.

영국은 두 차례 세계대전을 치르며 인도에서 막대한 쌀과 식량을 징발해 벵골에 대기근을 초래했습니다. 기근·전염병으로 인도 문화의 미덕인 관용·자선·베풂이 실종되고 약탈과 살육이 횡행했습니다. 끼니를 위해 부녀자의 정조가 팔리고, 나무 잎과 껍질을 끓여 먹으며 버티다 못해 인육을 먹는 참상까지 벌어졌습니다. 가축은 이미 풀과 여물 부족으로 떼죽음당했습니다. 문명 시대에 인간이 인간을 잡아먹는 이토록 처참한 야만은 일찍이 없었습니다.

교육에 미친 영향

인도 전통 교육은 종교·철학·정신성에 초점을 두었습니다. 브라만은 베다·우파니샤드·브라흐마나·스므리티·니티샤스트라·카비야샤스트라·점성술·아유르베다 등을 장기간 학습했습니다. 상인 계층(바이샤)은 기초 문해와 장부·계산법을, 크샤트리야는 기초 학문과 무술·마술·군사술을 익혔습니다. 장인·수드라 계층은 교육 기회가 거의 없었습니다. 무슬림 통치 시기 전통 교육이 거의 붕괴되었으나 사원·초등학교·브라만 스승 집에서 아동 교육이 명맥을 이었습니다.

영국은 초기에 인도 과목과 기존 매체 언어를 유지하면서도 신수학·자연철학·화학·해부학 등 실용 과학을 커리큘럼에 추가했습니다. 1835년 윌리엄 벤팅크가 맥컬리를 교육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했고, 맥컬리는 1835년 2월 인도 교육 제언에서 "인도에 서양 교육을 보급해야 한다. 우리와 피지배자 사이 매개체가 될 계급을 육성해야 하는데, 그들은 피와 색은 인도인이되 지성과 사상은 인도인이 아닌 자들이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벤팅크가 동의하며 영어와 영어 교육 보급이 시작되었습니다. 1835년 캘커타 의과대학 설립을 필두로 영국 관료와 기독교 선교사들의 노력으로 서양 교육이 확대되었습니다. 영국은 영어 교육 매개로 영어를 사용했고, 인도인에게 모국어가 아닌 영어는 난해해 수많은 이들이 중도 탈락하거나 교육에서 소외되었습니다.

1855년 회사 통제위원회 의장 찰스 우드가 새 교육 정책(우드 조서)을 발표해 각 주에 교육국 설치, 캘커타·마드라스·봄베이 대학 설립, 사립 교육기관 보조금 제도 도입, 교사 양성 기관 설립, 캘커타에 여학교 설립으로 여성 교육 운동을 강화했습니다.

서양 문학과 과학 유입으로 긍정적 변화도 컸습니다. 서양 지식·민족주의·혁명 사상이 유입되었고, 서양 교육을 받은 인도인들은 자국 언어에도 고급 문학이 창작되어야 함을 자각해 학회·인쇄소·신문을 설립했습니다.

신교육은 사회·종교 영역에도 파급되었습니다. 영어를 배운 이들이 인도에서도 사회 개혁을 열망했고, 특히 힌두교도 사이에서 개혁 열기가 뜨거웠습니다. 카스트·파르다·사티·조혼·지참금 폐지, 과부 재혼 장려, 식사 규제 철폐, 불가촉천민 타파, 하리잔 구제 운동이 전개되었습니다.

이로써 영어 교육 이후 신지식인 계층이 형성되어 자유·민주 사상을 전파하고 몸소 투쟁했습니다. 힌디가 전국 공통어가 아니었기에 영어가 그 간극을 메우며 제2 संपर्क어로 부상했고, 힌디권·비힌디권 간 사상 교류와 동질성을 가능케 했습니다.

영어를 익힌 이들은 영국인 신부·선교사들이 인도 종교·철학·문화를 헐뜯는 것이 허위임을 깨닫고, 인도 문화와 지혜가 서구 것보다 월등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1801~1802년 우파니샤드가 프랑스어로 번역되었고, 독일 철학자 쇼펜하우어가 읽고 인도 철학 사상의 위대함을 깨달았습니다. 여기서 서양 철학에 대한 인도 고전 철학의 우월성 이론이 싹텄습니다. 윌리엄 존스가 '아비지냐나 샤쿤탈람'을, 막스 뮐러가 '베다'를 번역해 산스크리트 문학과 철학을 세계에 알렸고, 인도 대학에서도 산스크리트 비평 연구가 시작되었습니다.

B. V. 반다르카르, 라젠드랄랄 미슈라, K. T. 텔랑 등 학자들이 인도인에게 서양 지식의 장점을, 서양에 인도 지식의 장점을 알렸습니다. 다야난다 사라스와티, 이슈와르 찬드라 비디아사가르, 케샤브 찬드라 센, 비베카난다, 마하데브 고빈드 라나데, 다다바이 나오로지 등 지성인들이 이 신각성 인도의 대표적 사회 개혁가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