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이야기

태양이 지지 않는 제국 대 떠오르는 태양: 카가얀 해적 소탕전

많은 나라의 역사에는 저마다의 '테르모필라이'가 있다. 널리 알려지지 않아 역사 애호가들의 마음속에만 남아 있는 전투들이기도 하다. 스페인 식민제국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 위에 떠 있던 '지지 않는 태양'은 국제 무대의 새로운 강자, 일본이라는 '떠오르는 태양'과 마주하게 되었다.

16세기는 스페인이 세계의 바다를 진정으로 지배하던 시대였다. 지리상의 발견 시대 내내 스페인은 거대한 야망을 드러냈고, 네 개 대륙에 걸친 광활한 영토를 확보했다. 상선대의 선창에는 금, 비단, 그리고 귀금속보다 몇 배나 비싼 향신료가 가득 실려 있었다.

그러나 광대한 제국과 풍부한 재보는 세계 곳곳에서 두려움과 질투를 불러일으켰다. 프랑스 왕국부터 오스만 제국, 지중해와 인도양, 그리고 카리브해와 동아시아의 해적들까지 — 스페인의 번영을 노리는 자들은 어디에나 도사리고 있었다.

일본인인가, 중국인인가?

먼 필리핀에서도 사정은 다르지 않았다. 1565년부터 스페인의 식민지가 된 이 지역은 식민지 개척자들과 일본인들 사이의 교역 중심지로 빠르게 성장했다. 교역은 특히 1573년경 절정을 이루었는데, 타이 푸사(Tay Fusa)와 그의 왜구(wakō) 해적단이 이 사업에 개입하지 않았다면 모든 것이 순조로웠을 것이다. 사령관과 그의 부하들은 일본인으로 여겨지지만, 언어학자들은 '타이 푸사'라는 이름이 일본어답지 않다고 지적하며 중국 기원일 가능성을 제기한다.

'왜구'라는 명칭 자체도 혼란을 낳았다. 중국인들은 이 용어를 중원과 한반도, 중국 연해를 약탈하던 해적들을 지칭하는 데 사용했다. '와(倭)'라는 글자는 일본 기원을 나타낸다(일본은 곧 '와'의 나라). 또한 중국 사료에는 '왜구(倭寇)'라는 표현도 등장하는데, 문자 그대로 '난쟁이 도적'을 뜻하며 '왜(倭)'라는 단어 자체가 일본인을 향한 매우 멸칭적인 어휘였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왜구의 대열에 일본 열도의 주민들만이 아니라 중국인, 말레이인, 심지어 유럽인까지 합류해 있었다는 사실이 알려져 있다.

해적 문제

스페인인들은 타이 푸사의 무리가 사략선단, 어쩌면 일본 천황 오기마치나 어느 일본 봉건 영주의 위임을 받아 활동하는 자들이라고 의심했다. 침입자가 누구든, 1580년 타이 푸사가 루손섬 북단의 카가얀 지방을 침공해 주민들을 자신의 통치 아래 복종시켰다는 사실은 분명했다. 이에 필리핀 총독 곤살로 론키요 데 페냘로사(Gonzalo Ronquillo de Peñalosa)는 해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해군과 왕립군을 파견했다. 위협은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여졌다. 총독이 국왕 펠리페 2세에게 보낸 서신에 따르면, 일본인들은 (놀랍게도!) 포병, 사수, 창병을 보유하고 갑옷을 갖춘 극도로 호전적인 민족으로 묘사되었다. 더욱이 이 무장의 상당 부분은 스페인의 오랜 숙적인 포르투갈 덕분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태양이 지지 않는 제국 대 떠오르는 태양: 카가얀 해적 소탕전

후안 파블로 데 카리온이 스페인 해적 소탕군을 이끌었다

징벌 원정대의 지휘는 후안 파블로 데 카리온(Juan Pablo de Carrión)에게 맡겨졌다. 그는 직업 군인도 아니었고 풍부한 전투 경험을 지닌 인물도 아니었지만, 적절한 계급을 가진 유일한 사람이자 마침 곁에 있는 인물이었다. 따라서 그가 이 임무를 감당할 수 있을지 우려가 컸다. 그가 거느린 병력은 테르시오 병사 60명과 약 1,000명의 선원, 그리고 현지 보조 부대 출신 인력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반면 타이 푸사는 부와 피에 굶주린 1,000명이 넘는 해적을 끌고 있었다. 그럼에도 카리온은 굴하지 않고 무장이 잘 된 갤리선 한 척을 포함한 7척의 배에 병력을 싣고 1582년 6월 루손섬 북부로 향했다.

해적과의 교전

곧 스페인 함대는 타이 푸사의 고립된 배 한 척과 조우했고, 화력 우위로 이를 격파했다. 이내 카리온 원정대의 항로에 또 다른 해적선이 나타났다. 그러나 이번에는 대포 사격만으로는 부족했고, 스페인의 기함 갤리선은 거대한 왜구 삼판(범선)과 나란히 붙었다. 승선전(接舷戰)이 벌어졌고, 스페인의 론델레로스(Rondeleros)는 갑옷을 두른 로닌(浪人)들과 정면으로 마주 섰다. 주군을 잃고 해적 대열에 합류한 이들 무사들이었다. 레이피어와 카타나가 휘날렸고, 아르케부스의 총성이 소름 끼치는 말벌 떼처럼 울려 퍼졌다. 그러나 해적들의 압박이 너무 강렬하여 카리온의 병사들은 적을 등에 진 채 자신들의 배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배 위에서야 병력을 재정비한 그들은 창으로 만든 뚫을 수 없는 벽과 강력한 머스킷 사격으로 진격하는 해적들을 마침내 막아섰다.

전투는 극도로 치열했고, 스페인인들의 경험과 뛰어난 전투 훈련만이 이 미친 듯한 공격을 버텨내게 했다. 이윽고 스페인 함대의 다른 배가 구원에 나서 대포 사격으로 갑판 위의 해적들을 쓸어버렸다. 많은 해적이 목숨을 구하고자 바다로 뛰어들었지만, 갑옷의 무게에 이끌려 그대로 가라앉았다.

이 연승에 고무된 카리온 함대는 6월 중순 타구스강, 이른바 리오 그란데 데 카가얀(Rio Grande de Cagayan) 하구에 도달했다. 그곳에는 18척의 해적선과 타이 푸사의 전사 600명이 지키는 요새가 자리하고 있었다. 스페인군은 경무장의 왜구 선박들을 성공적으로 돌파하며 그중 대다수를 파괴했다.

최후의 결전

카리온은 병사들과 일부 선원을 상륙시켜 방어 진지를 구축하기로 했다. 이윽고 스페인군의 진영은 짙은 화약 연기로 뒤덮였다. 배에서 내린 대포들이 해적 진영에 살육의 포격을 퍼붓기 시작한 것이다. 폭격에 지친 왜구들은 손실에 대한 후한 보상을 조건으로 철수하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스페인 사령관은 이를 거부하고 무조건 항복과 루손 철수를 요구했다. 타이 푸사 역시 굴복하지 않았고, 대포가 다시 무대의 주인공이 되었다.

태양이 지지 않는 제국 대 떠오르는 태양: 카가얀 해적 소탕전

해적들은 스페인군에 맞서 맹렬히 저항했다

스페인군의 총탄을 아랑곳하지 않고, 수적 우위를 확신한 해적들은 정면 공격에 나섰다. 세 차례에 걸친 공격은 푸사의 병사들에게 더 많은 피비린 손실을 안겼다. 이전 충돌에서 교훈을 얻은 스페인인들은 적이 창을 붙잡지 못하도록 창날에 기름을 발라두는 신중함도 잊지 않았다. 눈부신 활약을 펼친 사수들은 해적들에게 쇠와 납을 쏟아부었다.

그러나 죽음은 스페인 진영에도 대가를 치르게 했다. 세 번째 공격 이후 참호에는 겨우 30명의 병사만 남았고, 화약과 탄약도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어떠한 지원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 카리온은 역습에 나서기로 결심했다. 완벽한 규율과 질서 속에 스페인 왕관의 자랑인 테르시오 병사들이 참호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크게 줄어들고 지쳤지만 세계의 군대를 격파해 온 그들이 최후의 공격을 개시한 것이다. 이번에는 왜구의 대열이 무너졌고, 무기를 버린 그들은 뒷걸음질쳤다.

스페인 사령관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추격을 이어가 결국 타이 푸사의 세력을 완전히 궤멸시켰다. 전투에서 약 800명을 잃은 타이 푸사 본인은 역사의 페이지에서 모습을 감추었고, 이 지역에서 왜구의 활동은 오랜 세월 동안 크게 위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