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이야기

민족 운동에서 네타지 수바시 찬드라 보스의 공헌

민족 운동에서 네타지 수바시 찬드라 보스의 공헌

"우리의 일시적인 실패에 낙심하지 마라. 세상의 그 어떤 힘도 인도를 영원히 노예로 묶어둘 수 없다."

– 수바시 찬드라 보스

인도 정치사의 독보적 지도자

수바시 찬드라 보스는 인도 정치사에서 국가를 위해 다양한 전선에서 재능을 발휘한 유일한 지도자다. 그는 당대 가장 어려운 ICS(인도 문관) 시험에 합격했고, 대학 학장을 지냈으며, 거대한 무장 세력을 창설해 이끌었고, 병사로서 전쟁터에서 싸웠으며, 지도자로서 인도국민회의(National Congress) 의장을 역임했다.

그는 일본, 독일, 버마 등 국가들과 국제 조약을 체결했고, 독립 전에 이미 인도를 위한 임시 정부를 수립했다. 공직에 있는 동안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모든 방식으로 인도를 섬겼다. 그는 간디의 가장 강력한 반대자였지만, 동시에 간디를 '국부(國父)'라고 처음 부른 사람이기도 하다.

생애와 초기 활동

출생과 성장

수바시 찬드라 보스는 1897년 1월 23일, 카야스타(Kayasta) 계급의 가정에서 쿠타크(Cuttack)에서 태어났다. 다섯 살 때 영어 학교에 입학했는데, 인도 아이들은 연말 시험에서 1등을 해도 장학금 시험에는 응시할 수 없다는 말을 들었다. 같은 교육 기관에서 공부하면서도 타인보다 열등하게 취급받는 현실을 어린 나이에 깨달았다.

이후 인도 학교로 전학 갔을 때, 교장 베니마드하브 프라사드(Benimadhav Prasad)의 고결한 인품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또 스와미 비베카난다(Swami Vivekananda)의 연설과 저술은 그의 영혼에 새로운 각성을 주었다. 조국과 인류를 위한 봉사의 길로 들어선 그는 부모가 통제를 시도할수록 더욱 강하게 저항했다.

학창 시절과 혁명적 각성

1913년, 15세에 대학 입학 자격 시험을 전체 2등으로 통과한 뒤 캘커타 프레지던시 칼리지(Presidency College)에 진학했다. 당시 캘커타는 혁명 운동의 중심지였고, 대학 기숙사는 혁명가들의 모임 장소였다.

영국의 탄압 정책이 그의 정치적 의식을 자극했고, 제1차 세계대전은 군사력이 없는 국가가 독립을 지킬 수 없다는 확신을 심어주었다. 1919년 B.A. 학위를 취득한 이듬해 1920년, 영국으로 건너가 ICS 시험에 응시했다.

ICS 합격과 귀국

시험에 합격했으나, 식민지 정부를 섬기는 데 마음이 내키지 않아 임용을 거부했다. 1921년 봄베이로 돌아가 간디를 만났다. 당시 간디는 비협조 운동을 막 시작한 참이었다. 간디가 동참을 권유했으나, 보스의 마음을 움직이지는 못했다. 그는 다시 캘커타로 돌아왔다.

데시반두 치타란잔 다스와의 만남

얼마 뒤 '데시반두(조국의 친구)' 치타란잔 다스(Chittaranjan Das)를 만났다. 그에게서 비로소 따를 만한 지도자를 찾았다고 느꼈다. 다스가 생존하는 동안 보스는 그의 오른팔로 활동했다. 간디의 호소로 수많은 학생이 대학을 떠나자, 다스는 이들을 위해 국립 대학을 세우고 보스를 학장으로 임명했다.

의회 정치와 좌파 지도자로의 부상

이후 인도국민회의에 입당했다. 좌파 이념을 지지했지만, 당시 회의에는 다양한 이념의 인사들이 공존했고 좌파 세력도 상당했다.

투쟁가 수바시

1921년 웨일스 공(Prince of Wales)이 인도 방문 시, 전국적인 보이콧 운동의 캘커타 지도부를 맡았다. 1921년 12월 10일, 영국 정부는 다스와 보스 등 동지들을 체포했다가 며칠 뒤 석방했다.

1922년 차우리 차우라(Chauri Chaura) 사건으로 간디가 비협조 운동을 철회하자, 1923년 1월 1일 다스, 나르싱 치타만 켈카르(Narsingh Chintaman Kelkar), 모틸랄 네루(Motilal Nehru), 비탈바이 파텔(Vithalbhai Patel) 등이 회의에서 탈당해 '스와라지 당(Swaraj Party)'을 결성했다. 다스가 당수, 모틸랄 네루가 서기가 되었고, 기관지 '포워드(Forward)'의 관리자로 보스를 임명했다.

1924년 3월 캘커타 시의회 선거에서 스와라지 당이 대승해 다스가 시장이 되자, 보스를 집행관으로 기용했다. 하지만 1925년 6월 다스가 서거하면서 보스는 홀로 남았고, 영국 정부는 그해 10월 허위 혁명 음모 혐의로 그를 체포해 만달레이(Mandalay) 감옥에 수감했다. 약 2년 반 만인 1927년 5월 석방되었으나, 스와라지 당도 이미 와해된 상태였다. 보스는 다시 국민회의에서 활동하며 벵골 주 의회 위원장에 선출되었다.

국민회의 내 좌파의 영향력 확대

1925년 처음으로 국민회의 집행위원이자 총무로 선출되었다. 1927년 영국 정부가 인도 헌법 개혁을 명분으로 사이먼 위원회(Simon Commission)를 구성하자, 위원 전원이 영국인이라는 이유로 인도 전역에서 격렬한 반대 운동이 일어났고 보스는 벵골에서의 저항을 이끌었다.

1929년 12월 캘커타 회의에서 '네루 리포트(Nehru Report)'가 '자치령 지위(Colonial Swaraj)'를 요구한 데 반해, 보스와 좌파 동료들은 '완전 독립(Complete Independence)'을 주장했다. 간디는 1929년 12월까지 자치령 지위를 부여하지 않으면 비폭력 비협조 운동을 벌이겠다고 제안했으나, 보스는 '완전 독립 미만의 어떤 지위에도 만족할 수 없다'는 수정안을 제출했다. 표결 결과 반대 1,350표, 찬성 973표로 부결되었으나, 회의 내 보스의 위상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1년 뒤 자와할랄 네루(Jawaharlal Nehru) 의장 하에 열린 라호르 회의에서 완전 독립 결의가 압도적 지지로 통과되었고, 보스는 독립 투쟁의 최전선 지도자로 인정받게 되었다.

간디와의 날카로운 대립

1930년 간디가 불복종 운동을 개시하자 보스도 열성적으로 참여해 투옥되었다가 간디-어윈 협정(Gandhi-Irwin Pact)으로 석방되었다. 제2차 원탁회의에서 돌아온 간디가 운동 재개를 선언하자 다시 체포되었고, 건강이 악화되어 빈으로 요양을 떠났다.

간디와의 결별과 포워드 블록 결성

하리푸라 회의와 의장 연임

1938년 2월 19~21일 구자라트 수라트(Surat) 하리푸라(Haripura) 마을에서 열린 회의에서 보스는 만장일치로 의장에 선출되었다. 간디와 정책·운영 면에서 이견이 있었으나, 좌파의 세력을 고려해 아무도 반대하지 않았다.

1938년 보스는 진나(Jinnah)와의 화해로 국민 단결을 도모하려 했으나 진나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치타공(Chittagong) 방문 시 무슬림 연맹 단원들이 보스 일행을 습격해 보스를 포함한 15명이 부상당했다. 보스는 대중에게 인내와 자제, 증오 대신 사랑의 길을 호소했다.

제2차 세계대전과 '영국의 위기는 인도의 기회'

1939년 9월 제2차 세계대전 발발과 영국의 참전으로 간디와 보스의 갈등이 표면화되었다. 보스는 '영국의 위기는 인도의 기회'라 보았으나, 간디는 영국의 위기를 인도의 기회로 보지 않고 위기 시 영국에 협력하려 했다.

같은 해 트리푸리(Tripuri) 회의에서 보스가 재출마하자, 간디 진영은 파타비 시타라마야(Pattabhi Sitaramayya)를 내세워 저지하려 했으나 보스가 승리했다. 간디는 패배를 인정하며 "이제 회의 대표들이 내가 지지하는 원칙과 정책을 따르지 않는다는 데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선언했다.

보스가 환영받자 간디는 "회의에 있기 싫은 자는 나가라"고 맞받았고, 간디의 신호에 따라 집행위원 15명이 집단 사퇴하며 보스에게 간디 뜻대로 집행위를 구성하라고 압박했다. 분열을 원치 않던 보스는 간디, 네루, 크리팔라니(Kripalani) 등과 대화로 풀려 했으나 실패했다.

간디 측은 보스가 간디 의향대로 집행위원을 지명해야 한다는 안을 냈고, 양측의 합의는 불가능했다. 병석에 누운 보스는 들것에 실려 의제 위원회에 참석해 최후통첩을 제안했다. "영국 정부가 6개월 내 인도를 해방하지 않으면, 인도는 전쟁의 기회를 이용해 반영(反英) 세력으로부터 군사 원조를 받겠다." 간디가 강력히 반대해 부결되었고, 보스는 의장직에서 사임했다.

포워드 블록(Forward Bloc) 결성

의장직 사임 후 국민회의 내에 별도 파벌인 '포워드 블록'을 결성했다. 3대 강령은 (1) 신속한 독립 달성, (2) 간디 파벌 지도부 배제, (3) 타협 단호 반대였다. 보스는 "포워드 블록은 간디의 인격과 비폭력 비협조 원칙을 존중하나, 현 회의 고위 지도부에 충성을 맹세할 필요는 없다"고 천명했다.

국민회의 전 직위에서 축출

보스가 회의 단결을 위해 노력하는 와중에도 간디 지지자들은 그를 완전히 축출하려 했다. 신임 의장 라젠드라 프라사드(Rajendra Prasad)가 보스의 행보를 문제 삼아 해명을 요구했고, 보스가 소명했음에도 모든 직위에서 해임당하고 평당원 4명만 남겨두는 처분을 받았다. 이는 조직 민주주의 정신에 위배되는 모욕적 조치였다.

탈옥, 독일·일본행, 그리고 INA 지도부 장악

제2차 대전과 보스의 전략적 판단

보스는 제2차 대전에 대해 확고한 신념을 가졌다. (1) 영국이 세계대전에서 패해 대영제국이 해체될 것. (2) 역경에도 영국은 자발적으로 인도에 권력을 이양하지 않을 것이며, 인도인은 자유를 위해 싸워야 함. (3) 인도가 영국에 맞서 싸우고 영국과 교전 중인 국가들과 협력하면 독립을 쟁취할 수 있음.

포워드 블록은 보스 지휘 아래 대영 항전 준비를 시작했다. 위험인물로 간주된 보스는 1940년 7월 2일 체포되었고, 그는 "내 체포에 도덕적·법적 근거가 없다. 즉각 석방하지 않으면 단식하겠다"고 최후통첩을 보냈다. 정부가 묵살하자 11월 29일 단식에 돌입하며 벵골 총독에게 "개인이 죽어야 민족이 산다. 오늘 내가 죽어 인도가 자유와 영광을 얻어야 한다"고 썼다.

단식 며칠 만에 위독해지자 정부는 석방해 가택 연금했다. 약 40일간 방 밖으로 나오지 않던 어느 날, 영국과 인도인들은 경악했다. 삼엄한 경비망을 뚫고 보스가 변장해 도주한 것이다.

변장하고 카불(Kabul)에 도달, 모스크바(Moscow)를 거쳐 1941년 3월 28일 베를린(Berlin)으로 향했다. 독일 외무장관 리벤트로프(Ribbentrop)가 영접하고 독일 라디오를 통해 대영 선전 방송을 허용했다. 1942년 11월 독일 라디오로 메시지를 방송했고, 당시 히틀러(Hitler)는 전세가 유리해 보스의 인도 독립 투쟁 지원을 약속했다.

동남아시아 도착과 INA 인수

1942년 6월 라스 비하리 보스(Ras Behari Bose)가 동아시아 초청과 자신이 조직한 '아자드 힌드 파우즈(자유 인도 군대, INA)' 지휘권 이양을 제안했다. 1943년 2월 8일 독일 유보트(U-boat)로 프레켄 베르크(Frechenberg)를 떠나 마다가스카르(Madagascar) 인근 해상에서 일본 잠수함으로 갈아타고 수마트라 북부 사방(Sabang) 섬에 상륙했다. 지인 야마모토(Col. Yamamoto) 대령이 일본 정부를 대표해 영접했고, 5월 16일 비행기로 도쿄(Tokyo)에 도착했다.

도착 전 독일은 다전선에서 패퇴 중이었고 연합국 전세가 강해지고 있었다. 보스는 도조 히데키(Tojo Hideki) 총리와 장시간 회담했고, 도조는 보스의 인품과 논리에 감명받아 일본 의회(제국 의회)에서 "일본은 인도인을 억압하는 영국인을 축출하고 그 영향을 제거하며, 인도가 진정한 의미의 완전 독립을 이루도록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인도인을 향한 호소와 INA 재건

감동적인 메시지와 구호

1943년 7월 2일 싱가포르에 도착해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7월 4일 캐시 극장(Cathay Cinema Hall) 성대한 행사에서 INA 총사령관 직을 공식 수락했다. 중령 K. 바운슬레(K. Bhonsle)가 군인을 대표해 환영했다.

이 자리에서 보스는 자유 인도의 임시 정부 수립과 INA를 이끌고 인도로 진군할 것을 선언했다. 7월 5일 INA 재건을 선포하고 사열했다. 그는 "이 군대는 영국 예속에서 인도를 해방할 뿐 아니라, 훗날 자유 인도의 국군이 될 것이다. 전우여, 구호는 '델리로, 델리로(Chalo Delhi, Chalo Delhi)'다. 우리 중 몇 명이 살아남을지 모르나, 최종 승리는 우리의 것이다. 살아남은 전우들이 영국 제국주의의 또 다른 무덤인 레드 포트(Red Fort)에서 개선 퍼레이드를 하기 전까지 우리의 목표는 끝나지 않는다"고 외쳤다.

싱가포르 라디오를 통해 인도인에게 호소했다. "1년간 침묵하며 인내하며 때를 기다렸다. 이제 말할 때다. 영국인에게서 해방될 수 있다. 그들은 문화·정치·경제적으로 우리를 노예로 삼았다. 영국 제국의 적은 우리의 자연스러운 친구다. 모든 인도인을 대표해 선언한다. 영국 제국에 대한 전쟁은 인도가 자유로워질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델리로 가자. 이 길은 피와 땀과 눈물로 가득하다……"고 호소했다.

불멸의 구호 창안

인도인 각성을 위해 세계 최고의 구호들을 만들었다. '자이 힌드(Jai Hind)'는 전 세계로 퍼졌고, "너희가 피를 주면, 내가 자유를 주겠다(तुम मुझे खून दो, मैं तुम्हें आजादी दूँगा)"는 두 번째 구호, '델리로 가자(Chalo Delhi)'도 널리 불렸다.

자유 인도 임시 정부 수립

1943년 10월 21일, 자유 인도의 임시 내각을 구성해 락슈미 스와미나탄(Lakshmi Swaminathan) 대위 등을 장관으로 임명했다. 10월 23일 임시 정부 명의로 영국과 미국에 선전포고했다.

며칠 내 추축국(독일·일본·이탈리아)과 그 영향권 정부(샴·버마·필리핀 등)가 임시 정부를 승인했다. 일본은 안다만-니코바르 제도 행정권을 임시 정부에 이양했다.

INA 재편과 여성 부대 창설

보스는 INA 재편에 착수해 간디 여단, 아자드 여단, 네루 여단, 수바시 여단 등 4개 여단을 신속히 편성했다. 싱가포르에 여성 부대 훈련소를 세워 500명 여성 병사를 양성했다. INA 총사령관이 된 보스는 동아시아 인도 독립 운동 전반을 지휘했다. 남녀 별도 훈련소를 운영하고 힌두스탄어로 지시했으며, 6개월 훈련 후 정식 편입시켰다. 홍콩, 상하이, 마닐라, 자바, 수마트라, 보르네오 등지를 순방해 교포 사회를 결집시켰고, 그의 카리스마는 전폭적 지지를 이끌어냈다.

전선에서: 버마-인도 국경 전투

보스의 구상은 INA가 버마 전선에서 인도 국경으로 진입해 벵골과 아삼에서 영국군을 후퇴시키는 것이었다. INA의 승리가 인도 민중의 봉기를 촉발해 해방을 앞당길 것이라 믿었다. 해방된 땅은 INA가 통치하고 오직 인도의 삼색기만 게양할 계획이었다.

수바시 여단이 인도-버마 국경에 도달했고, 보스는 랑군(Rangoon)에 사령부를 뒀다. 소부대들이 인도인 장교 지휘 하에 진격했으나, 군대는 완전 무장되지 못한 상태였다.

1944년 1월 말, 제1대대는 아라칸(Arakan) 칼라단(Kaladan) 계곡으로, 제2·3대대는 친 힐스(Chin Hills)로 파견되었다. 제1대대는 서아프리카 흑인 부대를 격파하고 팔레트와(Paletwa), 달레트메(Daletme)를 점령했다. 5월 마독(Madok)을 탈환했는데, 이는 인도 땅에 있는 영국 최전초 기지였다. INA가 인도 영토에 첫발을 디딘 순간이었다.

그러나 영국군의 맹렬한 반격이 이어졌고, 일본군이 마독 지원에 실패하자 철수 명령이 내려졌다. 하지만 인도 병사들은 5월부터 9월까지 진지를 사수하며 삼색기를 휘날렸다.

제2·3대대도 뛰어난 무용을 보였다. 칼레와(Kalewa)~타수(Tasu)~포트 화이트(Fort White) 방어선을 맡아 연합군 게릴라를 소탕하고 메이저 모닝(Major Morning) 부대를 격파, 영국 전략 요새 클랑클랑(Klang Klang)을 함락시켰다. 일본 사령관은 수바시 여단 전체에 코히마(Kohima) 진격을 명령했고, 임팔(Imphal) 함락 시 브라마푸트라 강을 넘어 벵골로 진입할 계획이었다. INA 타 부대도 일본 만주리안 사단과 합류해 치열한 전투 끝에 코히마를 점령했다.

이후 일본이 타 전선에서 연패하며 전세가 역전되었고, 영국은 임팔에 증원군을 투입해 방어에 성공했다. 영국군이 디마푸르(Dimapur)와 코히마 쪽에서 반격해 오자 INA는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간디 여단이 4월 초 임팔로 파견되었으나, 일본은 이미 임팔이 함락됐으리라 예상했다. 도중 팔레일(Pallel) 인근에서 격전 중이란 소식을 접하고, 간디 여단 게릴라들이 팔레일 비행장을 장악해 항공기들을 파괴했다. 이 작전으로 약 250명 전사했으나 끝까지 버텨 영국군 진격을 저지했다. 6월 보급·탄약 부족으로 간디 여단 전력이 약화된 반면, 영국군은 증원으로 전력이 강화되었다. 우기철 타스-팔레일 도로가 유실되어 보급이 끊기자, 간디 여단도 일본군과 함께 버마로 철수했다. 1944년 3월 개시된 INA 주력 작전은 이렇게 막을 내렸다.

이 작전으로 인도 영토 약 150마일(약 240km)까지 진입했으나, 보급과 탄약 부족으로 점령지를 지킬 수 없었다. 약 4,000명 INA 장병이 전사했다.

최후의 나날과 의문의 죽음

영국군이 버마 재탈환을 위해 총공세를 펴자 일본군은 연이어 후퇴했고, 랑군 방어를 INA에 맡긴 채 철수했다. INA는 며칠간 분전했으나 1945년 5월 초 랑군이 함락되고 수백 명 병사가 포로로 잡혔다.

보스는 랑군→방콕→싱가포르로 이동했다. 독일·이탈리아가 이미 패망하고 일본만 홀로 연합국과 맞서던 중, 1945년 8월 6·8일 히로시마·나가사키에 원폭이 투하되고 소련도 대일 선전포고를 했다. 8월 15일 일본이 항복했다.

보스는 동료 하비브 우르 라만(Habib ur Rahman) 대령과 8월 17일 전투기로 사이공(Saigon)을 떠나 도쿄로 향했다. 17일 밤 투란(Tourane, 현 다낭)에서 묵고 18일 타이베이(Taipei)에 닿았으나, 이륙 직후 기체에 화재가 발생했다. 일본 장교 여러 명과 함께 보스도 사망했고, 라만 대령만 생존했다.

많은 이들이 이 사고로 보스가 죽지 않았다고 믿는다. 연합국 포로가 되는 것을 피하려 잠적했다는 것이다. 유골은 정중히 도쿄로 옮겨져 1945년 9월 14일 렌코지 사원(Renkoji Temple)에 안치되었다.

수바시 찬드라 보스 업적의 재평가

네타지 수바시 찬드라 보스의 업적은 동시대 어떤 지도자보다도 위대하다. ICS 합격, 대학 학장으로 청년 교육, 언론 편집으로 민중 계몽, 포워드 블록 같은 대중적 정당 창당, 불복종 운동 참여, 국민회의 지도, 무장 투쟁을 통한 독립 시도까지 전방위적 행보를 보였다.

그는 인도 땅 일부를 영국으로부터 해방시키고, 자국 정부를 수립해 세계 여러 나라로부터 승인받은 유일한 독립 투사였다. 간디의 비폭력 미로에 빠지지 않고 구체적 결과를 추구했으며, 조국 독립을 위해 모든 수단을 정당화했다. 국민회의에서 유일하게 간디의 사상과 운영을 공개적으로 비판하고, 간디 추천 후보 파타비 시타라마야를 의장 선거에서 꺾은 지도자였다.

보스에게 제2차 세계대전은 인도의 절호의 기회였다. 이를 활용해 독일·일본 수뇌와 담판을 벌인 유일한 지도자였다. 총독 웨이벨이 심라 회의(Simla Conference)에서 인도 지도자들을 유혹해 자치령 지위를 제시하던 때, 보스는 일본 땅 라디오 방송으로 인도 지도자들에게 "반쪽짜리 독립을 얻으려 총독 관저로 뛰어가지 말라"고 호소했다. 그는 인도의 독립을 보지 못했으나, 인도 독립에 지대한 공헌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