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최대의 범죄가 그들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그들은 앤 프랭크처럼 숨어 지낼 수도 없었고, 앞서 소개한 메리 버그처럼 외부의 보호를 받는 사람도 아니었다. 전쟁이 끝났을 때 그들은 이미 오래전에 목숨을 잃은 뒤였다. 그러나 그들의 생각과 말은 오늘날까지 살아 남았다.
다비드 루비노비치의 일기
다비드 루비노비치(Dawid Rubinowicz)는 1927년 7월 27일, 우유 배달원 요제크와 산파 타우바 루비노비치 부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키엘체 지역 크라이노 마을에 살던 일곱 유대인 가족 중 하나였다. 당시 키엘체 군 전체에는 약 3만 3천 명의 유대인이 거주하고 있었다.
전쟁 이전 다비드의 삶에 대해 알려진 것은 많지 않다. 재능 있는 소년이었고, 군사에 관심이 많았으며, 숲속 여행과 자전거 타기를 좋아했다고 전해진다.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왕성한 아이였다. 아마도 이러한 성격 덕분에 1940년 3월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초기의 기록은 매우 간결하다. 일상의 소소한 이야기와 당시 유대인에게 가해진 각종 제한이 주된 내용이다. 1940년 3월 21일의 첫 기록은 거리에서 목격한 포스터에 관한 것이다.
"새 고시가 붙었다. 유대인은 수레에 탈 수 없다(기차는 이미 오래전에 금지되었다)."
이후의 페이지에서도 다비드는 전쟁의 잔혹한 현실을 담백한 필체로 기록해 나간다.
"어제 점심을 먹고 폭탄을 만들러 보젠틴에 갔고, 그곳에서 밤을 보내기로 했다. 새벽 일찍 헌병대가 도착했다. 도로를 따라 이동하던 그들은 성 밖을 걷던 한 유대인과 마주쳤고, 아무 이유 없이 즉시 그를 사살했다."
단 한 장의 사진 덕분에 우리는 다비드 루비노비치의 얼굴을 알 수 있다(클릭하면 확대됩니다).
"그곳에서 이유 없이 두 명의 희생자가 나왔다. 집에 돌아가는 길에 그들과 마주칠까 몹시 두려웠지만, 다행히 만나지 않았다."(1941년 12월 12일, 원문 표기 그대로)
침묵하지 않은 기록
1942년 3월, 다비드는 가족과 함께 보젠틴 게토로 강제 이주당했다. 이 무렵부터 그의 기록은 점점 길어지고 감정적으로 깊어진다.
[...] "슈피아에 있는 동안 헌병들이 유대인 세 명을 끌고 가 비엘리니에서 처형했다(물론 총살이었다). 비엘리니에서는 수많은 유대인의 피가 흘렀고, 그곳에는 실로 유대인 묘지가 생겨났다. 이 끔찍한 유혈사태는 대체 언제 끝나는 것인가." [...]
이 글의 영감은 앤 프랭크의 일기(Znak Horizon, 2015)에서 받았다.
"크라이노 출신 농부가 찾아와 말하길, 옛 이웃집 소녀가 저녁 7시 이후에 길을 걷다가 총살당했다고 했다. 믿고 싶지 않지만,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는 세상이다. 꽃처럼 어린 소녀마저 총살당할 수 있다면, 이것은 분명 세계의 종말이다."(1942년 4월 10일)
마지막 기록의 날짜는 1942년 6월 1일이다. 기록은 문장 한가운데에서 끊긴다. 곧 다비데크와 가족은 수헤드니우 역으로 끌려갔고, 9월 22일 오전 11시 24분, 트레블린카로 향하는 열차가 출발했다.
추방되기 전 소년은 친구 타데크 바친스키에게 일기를 맡길 수 있었다. 1957년, 소년의 기록을 넘겨받은 기자 마리아 야로호프스카가 보젠틴을 찾았고, 곧 『일기』가 출판되었다. 이후 다비드 루비노비치는 키엘체 지역 유대인 비극의 상징이 되었다.
트레블린카행 열차에 몰아넣어지는 유대인들.
다비드 시에라코비치의 '일기'
루비노비치와 이름이 같은 다비드 시에라코비치(Dawid Sierakowiak)는 1924년 7월 25일에 태어났다. 우츠(Łódź) 유대인의 가난한 소시민 가정 출신이었다. 평균 이상으로 재능 있고 총명하며 부지런한 소년이었던 그는 장학금을 받아 사립 김나지움에 진학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학업을 마치지 못했다. 전쟁 발발 6개월 후, 그와 가족은 우츠에서 가장 가난한 동네인 바우티에 설치된 리츠만슈타트 게토에 갇히고 말았다.
타고난 인문학자였던 다비드는 이 무렵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그의 기록은 개인적인 사색이라기보다 게토 생활의 연대기에 가깝다. 사실상 모든 기록에는 하루 또는 일주일 식량 배급량에 대한 정보가 빠짐없이 담겨 있다.
소년은 전쟁의 경과에 대해 들은 소식을 꼼꼼히 적어 두었다. 동시에 '차임 1세 국왕', 즉 우츠 유대인 평의회(Judenrat) 의장 차임 룸코프스키의 행보에 대해서도 날카로운 논평을 남겼다.
더 나은 내일에 대한 희망은 없이…
처음에는 소년도 학업을 이어갔다. 일기에는 수업 이야기, 지하 청년 모임 활동, 순무 배급 작업, 어린 아이들에 대한 과외 등이 담겨 있다.
현존하는 단 한 장의 사진에 담긴 다비드 시에라코비치(클릭하면 확대됩니다).
그러나 1942년의 기록은 성격이 달라진다. 다비드는 혹독한 육체노동에 시달렸고, 그토록 사랑하던 읽기와 쓰기를 할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나는 너무 쇠약해져서 며칠씩 죽은 듯이 누워 있다. 아무것도 읽지 않는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 느린 죽음이 시작된다."(1942년 7월 5일)
"나날이 배급이 나오고, 그것을 사 먹고, 먹는 동안에도 먹은 후에도 굶주리면서, 이 저주받고 악마 같은 전쟁이 끝나기를 집요하게, 끊임없이, 흔들림 없이 기다린다. 요양, 집, 식사, 독서, 빈대와 바퀴벌레와 함께하는 밤—이 모든 것이 끝없이 반복된다. 힘은 계속 빠져나가고, 몸과 마음의 기능은 사라져 간다."(1942년 8월 11일)
그의 기록은 비극의 1942년 9월, 이른바 '대 스페라(Great Shpera)'가 선포된 직후 끝난다. 일기의 마지막 문장은 생애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었던 병든 어머니가 게토 추방을 기다리는 처절한 상황을 담고 있다. 다비드는 그로부터 1년도 채 살지 못했고, 그 사이 아버지마저 잃었다.
1940년의 리츠만슈타트 게토.
다비드는 1943년 8월 8일, 결핵과의 긴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났다. 여동생 나탈리아는 게토 청산 과정에서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로 추방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 1941년과 1942년의 기록이 담긴 노트들은 유대 역사 연구소에 보내졌고, 연구소는 1950년대 말 자체 기관지를 통해 이를 처음 공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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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문헌
- Kowalska-Leder, 『아동의 시선에서 본 폴란드 개인 문서 문학 속 홀로코스트 경험』, Wrocław, 2009.
- Młodkowska, 『다비데크 루비노비치는 어떻게 대학살을 기록했는가』, "Midrasz", 2002년 2호.
- Rubinowicz, 『일기』, Warszawa, 1987.
- Sierakowiak, 『일기』, Warszawa, 1960.
- Żukowski, 『나는 다시 나 자신을 느낄 수 있을까…』, "Midrasz", 2002년 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