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에는 자살보다 더 수치스러운 행위가 없었다. 그러나 엄격한 교회법과 거친 시대 풍조조차 삶의 의미를 잃은 사람들, 혹은 머리 위에 너무 무거운 짐을 얹은 사람들의 발걸음을 막지는 못했다.
브라가 교령, 자살 금지의 시작
일찍이 6세기, 브라가(오늘날 포르투갈)에서 소집된 교회회의(시노드)는 다음과 같이 결정했다. "스스로 죽음을 자초하는 자, 즉 칼이나 독으로, 혹은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거나 목을 매는 등 그 어떤 잔혹한 방법으로든 목숨을 끊는 자는 미사에서 언급하지 않는다. 그들의 시신을 매장할 때 어떤 시편도 읽어서는 안 된다." 나아가 자살자의 시신은 사형 선고를 받은 죄수의 시신과 정확히 같은 방식으로 처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무자비한 법
세월이 흐르면서 이른바 '브라가 교령'은 유럽의 자살에 대한 태도를 규정하는 기둥이 되었다. 이 교령은 수백 차례 필사되었고, 자살자의 '악마적 빙의'에 대한 언급이 덧붙여졌으며, 점점 더 새로운 제재가 추가되었다. 한 참회록에는 자살자의 시신을 "오염되지 않은 흙"에 묻어서는 안 된다는 조항까지 등장했다.

중세에서 자살자의 시신이 발견되는 것은 오늘날만큼이나 큰 충격이었다. 14~15세기 교체기 프랑스 사본에 남은 세밀화.
규정 자체는 겉보기에 무해해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는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들이 썩어가는 동물 사체 구덩이에 그대로 던져진다는 뜻이었다. 9세기 후반에 재위한 교황 니콜라스 역시 자살자들은 존엄한 장례를 받을 자격이 없다고 결론지었다. 그들은 다만 "부패의 악취가 산 자를 해치지 않도록" 땅에 묻힐 뿐이었다.
자살자의 시신은 공개적으로 전시되었고, 심지어 정교한 사후 굴욕 대접까지 감수해야 했다. 유족은 재산 몰수를 각오해야 했으며, 무엇보다 자살은 상상하기 어려운 굴욕의 원천이었다. 죄의 오명은 아내와 자녀, 손주에게까지 이어졌다. 자살자는 살인자보다 더 나쁜 죄인, 고리대금업자보다 더 무례한 존재로 여겨졌다. 결국 그는 하나님이 내린 선물을 공공연히 거부한 셈이었고, 타인의 연민조차 기대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자살은 중세 유럽에서 드문 일이었을까? 전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자살은 권력의 정점에서도 드물지 않게 일어났다.
폴란드의 왕 므슈코 2세와 같은 시대에 살았던 부르군트 백작 라쿨프는 "몽둥이와 손에 닿는 갖가지 물건을 휘둘러 자신과 주변 사람들을 해치려 했다"는 광기에 빠졌다고 전해진다. 그는 경건한 인물 성 베네딕토의 만류 끝에야 자살 시도를 접었다.
자살 충동에 시달린 황제, 하인리히 4세
독일 황제 하인리히 4세에게도 비슷한 충동이 찾아온 것으로 전해진다.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와의 서임권 분쟁, 그리고 카노사의 굴욕적인 참회로 유명한 이 논쟁적인 군주는 50세 무렵, 아들에게 권력을 빼앗기고 모든 자존감마저 잃으면서 더 이상 살 이유가 없다고 판단했다. 연대기 작가 콘스탄츠의 베르놀트는 이렇게 기록했다.
베르놀트에 따르면 하인리히는 "너무나 끔찍한 우울 상태에 빠져, 이른바 스스로 죽음에 몸을 바치려 시도했다"고 한다. 줄이나 칼을 이미 준비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그는 신속하게 움직인 궁정 신료들의 개입 덕분에 목숨을 건졌고, 결국 몰락한 통치자의 마지막 소원은 "실현되지 않았다".

에두아르트 슈바이저가 그린 '카노사의 하인리히 4세'.
권력의 멜랑콜리
아무도 구해주지 못한 자살의 이야기도 남아 있다. 형제에게 쫓긴 앵글족 왕자 에드윈은 강제 해외 항해 도중 절망 속에 파도 사이로 몸을 던지려 했다고 전해진다. 또한 독일 황제 프리드리히 2세(호엔슈타우펜)의 아들 하인리히 7세는 아버지에 대한 반란이 처참한 패배로 끝나자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1242년의 일로, 하인리히는 철저히 감시되는 요새에 유폐되어 있었다. 한 전승에 따르면 그는 창문에서 뛰어내려 죽음을 택했고, 다른 기록은 호위병들이 잠시 경계를 늦춘 사이 다리 위에서 강으로 몸을 던졌다고 전한다.
이야기는 여러 형태로 변형되었고, 불행한 왕위 계승자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감추기 위해 권력이 총동원되었다. 황제 프리드리히에게는 아들이 감옥에서 교살되도록 자신이 직접 명령했다는 설조차 덜 굴욕적으로 들렸다. 살인은 당대 정치의 일상적인 수단이었고, 그것으로 손을 더럽히는 일은 낯설지 않았다. 그러나 '자살한 아들을 둔 아버지'라는 낙인만큼은 분명 용납될 수 없었다.
이런 사례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15세기에 이르러서는 심지어 최초의 '자살 예고' 기록까지 등장한다. 보내는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끊겠다고 밝힌 가장 오래된 서신은 146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탈리아 우르비노의 군주 페데리고 다 몬테펠트로가 쓴 편지였다. 그는 의사에게 통풍의 고통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으며, 죽은 아들에 대한 그리움과 거듭된 전쟁 패배마저 견디기 어렵다고 하소연했다. 그 눈에 보이는 출구는 단 하나, 죽음뿐이었다.
명예와 절망 사이
교회의 혹독한 규율과 사후의 굴욕에도 불구하고, 중세의 왕과 황제들은 인간이었다. 권력 상실, 가족의 죽음, 굴욕과 질병이라는 절망 앞에서 그들 역시 스스로 목숨을 끊는 길을 택했고, 권력은 그 비극을 덮기 위해 진실을 왜곡하는 데 몰두했다. 화려한 왕관 아래에 도사린 깊은 어둠을 보여주는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