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쪽에는 민 머리의 귀족, 터키식 로브, 무지, 폭음, 농민 착취, 그리고 도시의 몰락이 있었다. 다른 한쪽에는 애국심, 위대한 전투, 그리고 폴란드적 정체성이 있었다. 과연 사르마티즘 신화의 실체는 무엇일까?
사르마티즘의 탄생
'사르마티즘(Sarmatism)'이라는 용어는 스타니스와프 시대 초기, 계몽주의가 만개하던 18세기 후반에 등장했습니다. 당시 계몽주의 작가들과 논객들은 16세기 말부터 17세기 초에 걸쳐 형성된 폴란드 귀족 문화를 지칭하기 위해 이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고대 유목민족 사르마타인의 후손이라는 주장은 16세기 말경 하나의 확고한 사실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사르마티즘은 정치적으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폴란드가 강대국으로서 누려야 할 권리를 정당화했고, 야기에워 왕조 정책의 동방 노선을 상징했으며, 리투아니아와 왕령 폴란드 사회의 인종적·언어적·종교적 다양성을 하나로 묶는 구심점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두 세계를 아우르는 땅, 라틴어로 '사르마티아'라 불리는…"
17세기에 들어서며 사르마티즘은 변모했습니다. 이제 이 용어는 폴란드인, 루테니아인, 리투아니아인 귀족에게만 적용되었고, 하위 사회 계층은 이 공동체에서 배제되었습니다. 귀족들은 자기 가문의 족보를 만드는 데 경쟁적으로 나섰는데, 그야말로 극에 달해 자우스키(Załuscy), 오팔린스키(Opaliński), 루보미르스키(Lubomirscy), 라지비우(Radziwiłłowie) 같은 명문 가문은 조상을 로마 시대, 심지어 그리스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주장했습니다.
야외에서 벌어진 폴로네즈
귀족들의 눈에 폴란드의 정치 체제와 귀족의 권리·자유는 특별하고 비범한 신의 보호를 받는 제도였습니다. 메갈로매니아의 정점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정치 체제 자체를 신의 창조물로 돌린 것이었습니다. 갈등은 필연이었습니다. 집권 왕들이 서방과의 유착을 마다하지 않고 외국 유행에 박수를 보내며 왕권 강화에만 몰두하는 모습에 귀족들은 분노했기 때문입니다. 귀족들은 궁정에서 외래 유행과 외국어를 걷어낼 것, 왕이 폴란드식 로브를 입고 폴란드 귀족다운 품행을 보일 것을 요구했습니다. 사르마티즘에 젖은 귀족들이 지그문트 3세 바사를 얼마나 싫어했는지는 물론 왕 본인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타민족에 대한 적개심은 결국 배외주의로 변질되었습니다. 그 화살은 서방뿐 아니라 타타르인, 롬인(집시), 유대인에게도 향했습니다. 참된 폴란드 시민은 덕 있고 올곧으며 용감하고 경건해야 했습니다. 이상적인 사르마타인이란 세이미크(지역 의회)의 웅변가이자 활동가, 조국의 권리를 수호하는 사람, 기사이자 중재자였습니다. 여기에 사르마티즘 시대 귀족의 가장 사랑받는 특징인 전설적인 귀족의 자유를 더할 수 있습니다. 세임(국회)이나 세이미크에서 제출된 모든 혁신적 개혁안은 귀족 특권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되어 깊은 불신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보수주의, 귀족적이고 옛 폴란드 관습의 옹호, 도처에 만연한 전통주의가 이때 뿌리내렸습니다. 사르마타인이 완벽한 체제의 주인이라는 생각은 '폴란드에는 바꿀 것이 없다'는 관념을 굳혔고, 이러한 사고방식은 정치 지식의 규범으로서 귀족 전체의 의식 속에 새겨졌습니다.
17세기 후반, 스웨덴·코사크·러시아·터키·타타르와의 전쟁이 국토를 휩쓸었습니다. 이러한 격랑 속에서 기사 정신이 되살아났습니다. 1674년, 터키의 응징자 얀 3세 소비에스키가 왕으로 선출되었고, 그의 주위에는 참된 사르마타인이자 선량한 군주의 모습이 집결했습니다.
가족과 함께한 얀 3세 소비에스키
연방의 쇠퇴
허구의 역사·지리 개념에 기반한 미신과 망상은 당대 삶에 만연했고, 나라를 강하게 만드는 대신 효과적으로 약화시켰습니다. 귀족과 중산층·농민 사이의 갈등은 깊어졌습니다. 이 계층들은 사르마타 민족에 속하지 않았으니까요. 귀족들은 프랑스식 절대군주제를 추구하는 아우구스트 2세의 즉위를 매우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18세기 초 북방전쟁 때 스웨덴군이 폴란드를 침공하자, 무질서에 빠진 나라는 스스로를 방어할 수 없었고, 귀족들은 싸우는 대신 자신의 영지 재건에만 골몰했습니다. 귀족은 이기적이고 허영에 젓고 무질서하며 미련해졌습니다.
이후의 시대는 아름답지 않았습니다. 깊은 몰락이 찾아왔습니다. 귀족은 자신의 마당 너머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고, 어쩌면 보고 싶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마침내 개혁과 변화의 시대가 도래해야 했습니다. 대규모 영지에서는 개혁이 단행되었고, 지적 운동과 정치·사회 개혁 사상이 일깨워졌습니다. 서두르지는 않더라도 꾸준히 과학과 문학에 대한 관심이 커져갔습니다.
사르마티즘은 독특한 생활양식, 풍습, 패션, 정치, 멘탈리티를 만들어냈습니다. 이 흐름에 대해 나쁜 말이 많지만, 분명 폴란드 민족 역사상 가장 독창적인 문화 현상 중 하나였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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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anusz Tazbir, 『The gentry culture in Poland』, 바르샤바,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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