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이야기

자코파네의 야만인들 — 문명이 도래하기 전 타트라 산맥 중심부의 삶

19세기 중반까지도 자코파네(Zakopane)는 낙후된 시골 마을에 불과했으며, 이 일대에는 산적과 밀렵꾼에 관한 전설이 전해지고 있었습니다. 당시 자코파네에는 제대로 된 숙박과 오락 인프라가 부족했고, 설상가상으로 크라쿠프에서 자코파네까지의 여정은 무려 반나절이나 걸렸습니다.

그러나 그 무렵 단발성 장난 정도를 제외하면 강도 행위는 이미 과거의 유물이 되어 있었습니다. 특사권을 가진 자들이 현지 건달들을 응징하면서부터입니다. 자코파네의 대부분 산적들은 저지른 죄값으로 교수형에 처해졌습니다.

"오늘날 자코파네에서는 절도가 알려져 있지 않다. 밤에도 집에 잠금장치를 하지 않는다 [...] 절도 소식을 들어본 적이 없다. 다만 외지 떠돌이들이 부유한 이를 노리고 짜고 들어 강탈하는 경우는 종종 있다. 하지만 그런 경우조차 매우 드물다."

야노시크와 산적들의 세계

화가 보이치에흐 코사크(Wojciech Kossak)는 당시 사람들이 국민 영웅보다 야노시크(Janosik)와 그 무리를 더 높이 평가했다고 언급했습니다. 전설적인 산적들에 대한 이야기—용맹함, 영웅심, 부자를 털어 가난한 이를 도운 깊이 뿌리내린 정의감—는 사실이 아니었지만, 신화처럼 미화되고 숭상되었으며, 자코파네의 많은 오두막에는 야노시크와 그의 무리를 그린 유리화가 걸려 있었다고 합니다.

자코파네의 야만인들 — 문명이 도래하기 전 타트라 산맥 중심부의 삶

야노시크와 그의 연인.

산악인들은 조국의 자유를 위한 투쟁 중 죽음이 아니라, 교수대 위에서 고통스럽게 몸부림치는 산적의 최후를 상상했습니다. 그들은 그런 삶 덕분에 후세 자코파네 주민들의 기억과 입에 오랫동안 남을 수 있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에이, 그들이 나를 붙잡으면 나는 교수형에 처하리
전나무 꼭대기에서 흔들리겠지!
에이, 주인님, 나를 길 쪽으로 돌려놓아라,
저 놈이 가는 모습을 한번 보게 해달라

19세기 후반에 들어서면 주변 마을에서 산적의 활동은 더 이상 발견되지 않았지만, 평범한 좀도둑은 여전히 존재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경우에도 주민들은 고문을 동반한 사적 재판으로 직접 정의를 집행해 죄를 자백하게 만든 뒤, 잔혹한 형벌을 가했습니다. 산적이 노비타르그(Nowy Targ) 법정에 회부되어야 하는 경우에도, 그는 먼저 피해자들로부터 고통스러운 보복을 받아야 했습니다.

자코파네의 야만인들 — 문명이 도래하기 전 타트라 산맥 중심부의 삶

타트라 산맥의 파노라마

자코파네 최초의 본당

자코파네에 첫 번째 성당이 지어진 것은 1847년으로, 현재까지도 코시엘리스카(Kościeliska) 거리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 이전까지 산악인들은 포로닌(Poronin)이나 호호우우(Chochołów)의 먼 성당에 갈 방법이 없었으므로, 성소 출석은 1년에 한두 번에 그쳤고, 기도문과 성가에 대한 지식 역시 형편없는 수준이었습니다. 게다가 산악인들 특유의 철학적이면서도 실용적인 태도가 팽배했습니다. "신은 어디에나 계시니 탁 트인 초원에서도 지고의 분과 대화할 수 있는데, 굳이 매주 미사에 참례하거나 신부님의 설교를 들을 필요가 있는가?"라는 생각이 그것이었습니다.

이렇게 굳게 자리 잡은 태도와 1847년 자코파네의 첫 본당(훗날 체스토호바의 성모 본당)의 초대 주임 신부가 마주하게 됩니다. 요제프 스톨라르치크(Józef Stolarczyk) 신부는 이 시기를 본당 기록부에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 모든 것을 차근차근 살펴본 끝에 나는 매우 슬픈 처지에 놓여 있음을 깨달았다. 본당 신부인데 신부관도 없고, 성당도 없고, 비품도 없고, 아무것도 없다. 게다가 반야생적이고 교활하며 탐욕스러운 백성들이 내 주위에 모여들었으니, 배움을 위해가 아니라 한 푼이라도 얻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나는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했다."

자코파네의 야만인들 — 문명이 도래하기 전 타트라 산맥 중심부의 삶

자코파네의 초대 주임 신부 요제프 스톨라르치크 신부는 산악인들 사이에서 큰 호감과 존경을 얻었습니다.

'자코파네의 사도'로 불리다

초기에 스톨라르치크 신부는 주민들이 미사와 고해성사에 참석하도록 격려하기 위해 소액 대출을 해주고 선물을 나눠주는 등 온갖 노력을 기울여야 했습니다. 부임한 지 1년 뒤에는 마을 유치원을 열었고, 교사 역할은 오르가니스트 얀 스와빈스키(Jan Sławiński)에게 맡겼습니다.

교육 진흥 구상은 자코파네 주민들의 호평을 받았지만, 신부가 존경과 신뢰를 얻은 이유는 이것만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설교는 산악인들에게 하나의 대중 대학과 같았습니다. 설교에는 주변 세계에 대한 교양 지식, 개인 위생, 살림살이 관리, 올바른 복장과 예절, 절제와 불필요한 폭력에 대한 교육까지 아우르는 세속적 지식이 담겨 있었습니다. 그는 주민들에게 피서객들을 환영하도록 설득했고, 자코파네를 찾고자 하는 관광객들과 직접 접촉해 숙소와 산악 가이드를 물색해주기도 했습니다. 그의 기업가 정신 덕분에 산악인들은 굶주림에서 벗어나 스스로 돈을 벌기 시작했습니다.

방언으로 설교하고 신자들의 삶의 모든 면을 돕던 카리스마 넘치는 주임 신부는 지역 공동체의 확고한 지지와 사랑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스톨라르치크 신부는 목자로서 자신의 본당이라는 '양떼'를 헌신적으로 돌보며, 자코파네 산악인들을 문명에 한 걸음 더 가까이 이끌었습니다.

참고 문헌

  1. A. 리사크, 『타트라 산맥 아래의 목가(Sielankowanie pod Tatrami)』, Czarne 출판사 / 타트라 박물관, 2019.
  2. M. 스테츠코프스카, 『타트라와 피에니니 여행기』, 크라쿠프, 1858.
  3. W. 코사크, 『회고록』, 크라쿠프, 1913.
  4. K. 프셰르바테트마예르, 『스칼니 포드할레에서(Na skalnym Podhalu)』, 바르샤바, 1997.
  5. W. 크리고프스키, 『폴란드 산악 관광사 개관』, 바르샤바, 19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