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9년의 여름은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직전, 폴란드인들이 보낸 마지막 즐거운 계절이었다. 활기 넘치는 젊은이들, 연인들, 그리고 폴란드의 바다를 향해 떠나는 만원 열차 — 1939년 7월과 8월의 풍경은 한껏 목가적으로 보였다. 하지만 당시 폴란드인들은 무엇을 생각하고 어떤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을까? 그들은 무엇을 알았고, 무엇을 느끼고 있었을까? 신문들은 어떤 기사들을 실었을까?
1939년 늦봄, 해안가의 온도계는 하루 중 가장 더운 시간에도 겨우 십여 도 섭씨를 가리키고 있었다. 무더위도, 관광객의 갑작스러운 몰림도 예감되는 기미는 전혀 없었다. 그러나 6월 들어 기온이 뜻밖에 오르면서 폴란드인들은 발트해변에서의 휴양에 큰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유라타(Jurata), 야스타르니아(Jastarnia), 헬(Hel), 차투피(Chałupy) 등 해변 마을들은 포위 공격을 받다시피 한 붐을 경험했다. 부자든 서민이든, 사회복지 기금 덕분에 수많은 노동자들까지도 해안 마을로 향했다.
해변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
지중해성 기후
곳곳에 내리쬐는 폭염은 일광욕객들의 환영을 받았고, 발트해의 수온은 무려 27도에 이르렀다. 모래언덕에는 사하라사막 같은 조건이 펼쳐져, 한낮의 직사광선 아래 기온이 50도를 넘기도 했다.
태양은 내리쬐고, 바다는 통통한 다리를 어루만진다. 아, 얼마나 좋은가! 소나무에서는 진이 흐르고, 주근깨가 밴 갈매기 한 마리가 뱃머리에 내려앉았다. 칼리시(Kalisz)에서 온 피서객은 "여기가 바로 리비프(Lwów)라네~"를 흥얼거리며 크라쿠프 소시지를 맛보고 있다.
발트해에서 휴식을 즐기는 해변 방문객들. 별도의 목욕 구역이 보이며, 배경에는 부두가 자리하고 있다.
최고의 즐길 거리? 오직 폴란드 해변에서만
민박집과 펜션의 객실은 물론, 온천관, 상점, 카페, 공원, 해변까지 즐거움을 찾아 온 관광객들로 가득 차 있었다.
[야스타르니아의] 돔 즈드로요(Dom Zdrojowy, 온천관)에서는 신나는 재즈가 울려 퍼지고, 수십 쌍의 다리가 '아늑한' 댄스 플로어 위를 필사적으로, 그리고 성실히 밟고 있다.
야스타르니아의 주민들은 휴양객들의 체류가 더욱 즐겁도록 공공 공간의 사소한 디테일까지 세심하게 손질했다.
맑고 하얀 바닷모래 위에는 여러 빛깔의 아름다운 장미가 핀다. 이 기적은 포메라니아에서 검고 비옥한 흙을 모아 800량의 화물차에 실어 야스타르니아로 운반한 현자들 덕분에 이루어졌다. 그들은 장미 덤불 하나하나 아래에 흙 한 줌을 쏟아붓으며, 마을 전체를 꽃으로 가득한 정원으로 만들었다.
조용한 휴식을 원하는 피서객들에게 헬(Hel)은 평화의 오아시스였다.
여기에는 재즈 소음으로 밤을 새우는 여름철 유혹이 없다. 사람들이 카드 놀이를 하는 일도 좀처럼 없다. 그리고 취한 사람을 찾으려 해도 헛수고일 것이다. […] 여기서는 일찍 일어나 목욕을 하고, 밥을 먹고, 아름다운 숲을 산책하며 시간 가는 줄도 잊은 채 해가 지면 잠자리에 든다. 휴식은 휴식이다.
발트해에서 휴식을 즐기는 해변 방문객들
정상적인 볼거리와 그렇지 않은 볼거리
여름 피서객들은 다채로운 경험을 누릴 수 있었다. 해변에서 몸을 녹이고, 바다에서 수영하고, 역사적인 명소와 등대를 감상하고, 어항과 도시 공원을 둘러보고, 유람선에 올라 춤판이나 영화 상영을 즐겼다. 그리고 그디니아(Gdynia) 숲속에서는 수없이 많은 연애 행각이 벌어졌다.
숲의 구역은 일종의 불문율에 따라 나뉘어 있어서, 덤불 하나하나마다 단골손님이 정해져 있었고 누구도 남의 영역에 끼어들지 않았다. 우리 독자 중 한 명은 쌍안경으로 한 기력 넘치는 여인이 정의를 집행하는 장면을 목격할 기회가 있었다. 그녀는 슬그머니 다가가 적절한 순간 불륜을 저지른 남편을 붙잡아, 남편과 그 우상을 아주 호되게 두들겨 팼던 것이다.
반면 보수적인 관광객들은 일부 해변 방문객의 노출이 심한 차림새와 짙은 화장에 분노했고, 이를 대중 앞에서 스캔들스럽다고 여겼다.
건전하고 도덕적인 사고를 지닌 폴란드 사회가 우리 숙녀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이 역겹고 추악한 타락의 징후에 왜 반응하지 않는단 말인가? 흔히 이런 '유행'이 그렇다고들 하지만, 이런 '유행'은 최대한 빨리 종식되어야 한다. 그것은 가장 아름답고 섬세한 인간들 사이에 도덕적 부패의 씨앗만 뿌리고 있으니 말이다.
발트해에서 휴식을 즐기는 해변 방문객들
발트해 위에 드리운 전운
멋진 볼거리와 휴식으로 가득했던 평화로운 시간은, 해변을 따라 퍼져 나가던 국제 정세에 대한 소식에 의해 흔들렸다. 대중과 언론은 이런 소식을 과장된 것, 휴가 분위기를 깨뜨리려는 것으로 치부했고, 1939년 휴가철도 지난해처럼 길어질 것이라고 예측했다. 당시 이런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우려되는 징후]는 사실이 아니며, 이미 확인된 바로는 외국 첩보 기관의 밀정들이 퍼뜨린 것이다. 그디니아 정부 특별행정청은 폴란드의 평온과 침착함을 노리는 각종 밀정의 도청에 경계할 것을 경고한다.
1939년 6월 말, '바다의 날' 행사가 시작되면서 폴란드 전역은 "우리는 발트해에서 밀려나지 않는다"는 구호 아래 열광적으로 축제를 벌였다. 그디니아 한복판 그룬발츠키 광장에서는 8만 명이 넘는 참가자가 바다 맹세(로타)를 함께 외치며, 폴란드인들이 단치히 자유시와 포메라니아를 결코 싸움 없이 내주지 않겠다는 서약을 확인했다.
[우리는 맹세했다] 발트해에 대한 폴란드의 영원한 권리와 그 해양적 운명을 지킬 것, 비스와 강 하구를 수호할 것, 그리고 국경 너머에 있는 형제들 — 폴란드 민족의 불가분의 일부를 지지하고 방어할 것을.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소서!
1939년 7월과 8월은 폴란드인들에게 최악의 사태에 대한 불안과 준비의 시간이었던 동시에, 아직 남아 있는 평화를 만끽하며 그 마지막으로 화창한 나날들을 즐기려는 시간이기도 했다.
참고 문헌
- M. Zaborski, 『We are still alive. Summer '39』(Bellona, 2019)
- ABC-Daily News, 1939년 7월–8월호
- Dziennik Bydgoski, 1939년 7월–8월호
- Kurier Poznański, 1939년 7월–8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