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모도 뛰어나지 않았고 정치 무대에서도 큰 목소리를 내지 못했지만, 역사가들은 엘주비에타 라쿠샨카를 가장 충실히(그리고 행복하게) 살아낸 폴란드 군주의 배우자 중 한 사람으로 꼽습니다. 결혼이 가져다준 의무를 기꺼이, 아니 그 이상으로 수행했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야기에우워 왕조의 카지미에시 4세에게 13명의 자녀를 낳았고, 그중에는 왕 네 명, 추기경 한 명, 그리고 한 분의 성인까지 배출되었습니다.
폴란드 군주의 배우자 중 극소수만이 누린 진심 어린, 강요되지 않은 부부의 사랑. 그리고 그 사랑은 놀랍도록 다산한 결실로 이어졌습니다. 그 결과 엘주비에타 라쿠샨카는 평생 대부분의 시간을 임신 혹은 출산으로 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어린 시절 심각한 병을 앓았고 이후에도 여러 질환이 그녀를 따라다녔음에도, 열세 명의 자녀를 무사히 출산했다는 점은 놀라운 일입니다(그중 열한 명이 성인까지 살아남았다는 것 자체도 당시 기준으로는 상당한 성과였습니다). 흥미롭게도 그녀가 최고 기록 보유자는 아닙니다. 폴란드 왕비 중 가장 많은 자녀, 무려 열네 명을 낳은 것은 작센의 아우구스트 3세의 아내 마리아 유제파였습니다. 그러나 '왕들의 어머니'라 불릴 자격은 단연 라쿠샨카에게 있었습니다. 실제로 그렇게 불렸으니까요.
그 누구와도 닮지 않은 얼굴
1436년에서 1439년 사이(정확한 연도는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독일·헝가리 국왕이자 합스부르크 가문의 알브레히트 2세의 셋째 아이로 태어난 엘리자베트는, 어린 소녀 시절부터 거대한 정치의 소용돌이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늙은 점성술사가 "당신의 태양은 유럽의 통치자들을 낳을 것"이라 예언했기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왕관을 둘러싼 경쟁의 미묘한 이해관계를 어린 공주가 알았을 리 없지만, 바로 그 경쟁이 그녀의 인생을 결정짓게 됩니다. 1454년 2월, 합스부르크 가문의 피를 이은 17세 공주는 폴란드 국왕 카지미에시 4세 야기에우워치크와 혼인합니다.

카지미에시 4세 야기에우워치크
결국 38년이라는 세월을 함께하며 우리 군주 역사상 가장 행복한 부부 관계 중 하나로 꼽히는 이 혼인은, 사실 거의 이루어지지 않을 뻔했습니다. 왜일까요? 부드럽게 말해 라쿠샨카는 미모로는 도무지 칭찬할 만한 구석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현존하는 유일한 초상화에서 그녀는 통통한 얼굴에 살짝 돌출된 눈, 합스부르크 가 특유의 앞으로 나온 아랫입술을 지닌 작은 체구의 금발 여인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카롤리나 스토예크사비차는 다음과 같이 전합니다.
기록에 남은 묘사와 유골 조사를 통해 밝혀진 사실들은 왕비에게 더욱 호의적이지 못했습니다.
그녀는 앞니가 앞으로 크게 돌출될 정도의 심한 부정교합을 지녔던 것으로 보입니다. 라쿠샨카의 몸은 심한 척추측만증으로 인해 크게 일그러져 있었는데, 척추가 'S'자 모양을 이루어 머리가 오른쪽 어깨 쪽으로 기울어 있었습니다. (...) 얼굴 역시 좌우 비대칭이 심해 왼쪽 절반이 오른쪽보다 덜 발달해 있었다고 합니다.
이런 상황을 감안하면, 카지미에시 야기에우워치크가 파견한 사신이 신부 후보에 대해 "용모와 체격이 남들과 별반 닮지 않았다"고 외교적으로 표현한 것도 놀랍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젊은 왕이 어떤 소식을 듣든 두려움을 느꼈다고 비난하기는 어렵습니다(실제로 그는 혼약을 깨고 신부를 돌려보낼 생각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국가의 이익이 미학적인 문제보다 우선했고, 혼인은 성사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혼인은 의외로 성공적이었습니다. 정략결혼에서 그것이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피오트르 벵초프스키는 "카지미에시는 일부일처주의 군주였으며, 기록 속에 화려한 로맨스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고 강조합니다. 게다가 왕비의 지적·정신적 매력은 미모의 부족함을 충분히 보완해 준 모양이었습니다. 어쨌든 두 사람은 진심 어리고 깊은 사랑에 빠졌고, 그 가장 좋은 증거가 바로 그들이 낳은 자녀의 숫자였습니다.

브와디스와프 2세 야기에우워치크
첫째 아들 브와디스와프는 결혼 2년 후에 태어났습니다. 이후 자녀들은 1년, 때로는 2년 간격으로 계속 태어났고, 모두 열세 명에 이르렀습니다. 막내딸(역시 엘주비에타라 불렸습니다)은 라쿠샨카가 47세에 낳은 아이였으니, 그녀의 건강이 얼마나 탄탠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녀가 낳은 어린 야기에우워들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미로스와프 마치오로프스키가 정리한 목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일곱 딸 중 두 명은 어린 시절에 요절했지만, 나머지는 주로 여러 독일 제후들과 좋은 혼인을 하였다. 장남 브와디스와프는 보헤미아와 헝가리의 왕이 되었고, 차남 이하의 아들들—야누스 올브라흐트, 알렉산데르, 지그문트—은 폴란드의 왕이 되었다. 막내 프리데리크는 추기경 겸 폴란드 총대주교가 되었고, 요절한 카지미에시는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실로 대단한 결과가 아닐 수 없다!
왕조의 이익을 확보한다는 점에서 라쿠샨카는 스스로에게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남편 역시 그것을 높이 평가했고, 가족과의 관계를 소중히 여겼습니다. 피오트르 벵초프스키의 증언은 이렇습니다.
카지미에시는 거의 늘 왕비와 자녀들을 곁에 두고 다녔다. 다만 북쪽으로 행차할 때는 안전이 덜 보장되는 곳이었기에 그녀를 나라의 중심부에 남겨두었지만, 멀리 떨어진 곳은 아니었다. 일을 마친 왕은 아내를 데리러 돌아왔고, 이후 두 사람은 함께 리투아니아 등지로 길을 나섰다.
15세기 70~80년대 전환기에는 아이들을 데리고 무려 5년 동안 그곳에 머물며 크라쿠프에는 거의 들르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것이 두 사람의 관계를 잘 보여줍니다. 아내와 딸들, 아들들은 거의 언제나 그의 곁에 있었습니다.
말 없는 왕비
라쿠샨카가 카지미에시 곁에 늘 함께한 것은 왕가의 놀라운 자녀 수로 이어졌지만, 정작 나라의 정치 생활에서의 입지로 이어지지는 못했습니다. 역사가 알레산데르 기에슈토르는 이 군주의 부인의 주된 야망은 아들들을 주변국의 왕좌에 앉히고 딸들을 최대한 좋은 조건으로 시집보내는 것이었다고 평가했습니다.
피오트르 벵초프스키도 비슷한 견해이며, 다음과 같이 강조합니다.
엘리자베트는 왕의 든든한 조력자였다. 때로는 비밀 협상 중에 그를 위해 독일어를 통역해 주기도 했다. 높은 정치적 지위를 갖지는 못했지만, 나름의 역할을 하려 노력한 듯하다. 카지미에시가 그단스크 시민들에게 보낸 편지 하나가 유명한데, 왕비가 누군가를 관직에 앉히려고 명령을 내리면 그것에 따르지 말라고 일렀다. 카지미에시는 아내가 그렇게 욕심을 부리는 것을 허용할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폴란드의 왕비로서 라쿠샨카가 마음을 쏟은 것은, 역사가 보여주듯 그녀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 즉 왕을 낳고 기르는 일이었습니다. 황제의 위대한 가문 출신임을 평생 자랑스러워하던 이 긍지 높은 군주의 부인은, 이 분야에서 너무나 자신감이 넘쳐 66세에 후계자를 기다리던 아들 브와디스와프에게 사실상 『De institutione regii pueri(왕실 자녀의 교육)』라는 제목의 논문 같은 편지를 보냈습니다. 맏아들에게 그녀는 이렇게 일렀습니다.
고로 왕자에게는 가장 정직한 유모와 가장 훌륭하고 교양 있는 교사를 붙여야 한다. 그래야 그로부터 좋은 예법, 문장술과 문법 같은 학문을 배울 수 있으니 말이다(...). 매일 미사를 들려주고, 음식에 있어서는 절제와 검소함을 익히며, 이른 아침부터 공부에 힘쓰고 몸을 단련하며, 게으름과 나태를 피하고, 아첨꾼의 달콤한 말을 결코 듣지 않도록 하라.

크사베리 필라티의 1888년작 「폴란드 왕공족 초상」 연작 속 카지미에시 4세 야기에우워치크
지금 돌이켜봐도 그녀의 조언은 일리가 있습니다. 엘주비에타가 단 한 가지 잘못 짚은 것이 있다면, 브와디스와프가 바라던 아들이 아니라 작은 딸 안나를 얻었다는 것 정도였습니다.
생애의 끝무렵, 운명은 라쿠샨카에게 그리 관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남편뿐 아니라 세 아들을 먼저 보내며 장송의 고통을 겪었습니다. 이 개인적 비극이 그녀의 건강에 큰 영향을 미쳤음은 물론입니다. 킹가 스토예크사비차는 다음과 같이 전합니다.
마침내 왕비는 병석에 누웠다. 병세는 짧았지만 안타깝게도 치명적이었다. 어쩌면 엘주비에타는 가장 아끼고 가장 유망했던 아들 야누스 올브라흐트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마음이 크게 상해 있었을지도 모른다.
왕들의 어머니는 1505년 8월 30일, 당시 기준으로 매우 고령인 일흔 살을 일 년 남겨두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녀는 바벨 대성당에서 사랑하는 남편과 요절한 딸들(역시 엘주비에타라 불렸던) 곁에 잠들었습니다. 그녀가 남긴 유산은 실로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전성기에 유럽의 광대한 영토를 지배했던 강력한 왕조였습니다. 만약 라쿠샨카의 손자 지그문트 2세 아우구스트가 저명한 할머니만큼 다산했더라면, 유럽 대륙의 역사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흘렀을지도 모릅니다.
참고 문헌:
- U. Borkowska, 『폴란드의 야기에우워 왕조』, PWN, 2011.
- M. Duczmal, 『야기에우워 가문: 인명 사전』, Wydawnictwo Literackie, 1996.
- M. Maciorowski, B. Maciejewska, 『폴란드의 통치자들: 새롭게 들려주는 이야기』, Agora, 2018.
- K. Stojek-Sawicka, 『왕가의 질병들』, Bellona,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