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이야기

저녁 식사도 함께하지 못할 만큼 서로를 미웠던 걸까? 야드비가와 야기에우워는 왜 따로 식사했을까

행복하게 살았을까요? 결코 아니었습니다! 많은 역사학자들은 야드비가 안주이스카와 브와디스와프 야기에우워의 관계에서 행복은커녕 평범한 합의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고 강조합니다. 그렇다면 부부가 식탁을 따로 사용한 것도 그 때문일까요?

야드비가와 야기에우워가 서로 소원해져서 같은 식탁에 앉는 것조차 견딜 수 없었고, 심지어 부엌까지 따로 두었다는 주장은 수백 년 동안 되풀이되어 왔습니다. 19세기 역사학자들은 왕실 부부 사이의 불화를 열정적으로 기록했습니다.

저녁 식사도 함께하지 못할 만큼 서로를 미웠던 걸까? 야드비가와 야기에우워는 왜 따로 식사했을까

왜 야드비가와 야기에우워는 따로 식사를 했을까요?

사실 두 사람이 따로 식사했다는 사실 자체는 부인할 수 없습니다. 야드비가는 궁정 귀부인들, 성직자들, 그리고 브와디스와프가 초대한 귀족 부인들(때로는 크라쿠프 시민 계층의 저명 인사들)과 함께, 야기에우워는 궁정 신하들, 사절들, 교회 고위 성직자 및 다른 남성 손님들과 함께 식사했습니다.

중세의 예법

그러나 이러한 '식탁의 분리'가 정말 부부 간의 불화 탓이었을까요? 전적으로 그렇지는 않습니다. 중세 유럽에서는 이런 관습이 흔한 일이었습니다. 카지미에시 3세 대왕과 브와디스와프 1세 우스키 역시 왕비 없이 식사했습니다.

물론 이탈리아-프랑스 방식에서는 함께 연회를 벌이는 것이 허용되었고, 헝가리 궁정도 서구식으로 식사했기에 야드비가의 부모는 자주 같은 식탁에 앉았습니다. 하지만 위카 필리포비치는 저서 『왕과 함께한 식탁: 야기에우워부터 엘리자베스 2세까지 왕실 연회의 역사』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야드비가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이 관습을 바벨로 옮기지 않았습니다. 피아스트 전통에 대한 경의였을 수 있습니다. 어머니와 할머니 양쪽 모두에게서 피아스트 혈통을 이어받았고, 피아스트 가문의 유산을 물려받은 몸이니까요.
야기에우워가 별도의 식탁을 고집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가문적 연관성 때문에 그는 이 관습이 깊이 존중되던 루테니아의 풍습과 강하게 연결되어 있었으니까요. 아니면 바벨 궁정을 운영한 폴란드 귀족들이 '예전처럼' 꾸미길 원했거나, 외래의 새로운 풍습을 달가워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물론 이것이 두 사람이 식당에서 한 번도 마주치지 않았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특히 중요한 국가적·가족적 축하 행사나 특별한 손님을 맞이할 때는 같은 식탁을 나눴습니다.

입맛의 문제

그런데 별도의 부엌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첫 번째 이유는 매우 현실적입니다. 하나의 부엌으로는 왕실 가족과 손님들의 식사 수요를 감당하기 어려웠습니다. 일상적인 식사조차 종종 대규모 연회처럼 치러졌고, 식탁에는 때때로 수십 명의 손님이 앉곤 했습니다.

저녁 식사도 함께하지 못할 만큼 서로를 미웠던 걸까? 야드비가와 야기에우워는 왜 따로 식사했을까

알렉산데르 아우구스티노비치가 그린 야드비가 안주이스카

두 번째 문제는 야드비가와 야기에우워의 맞지 않는 입맛이었습니다. 위카 필리포비치는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전합니다.

야드비가는 프랑스-이탈리아 계열의 더 가볍고 세련된 요리를 선호했습니다. 그것은 곧 그녀의 어린 시절 음식이었으니까요. 반면 야기에우워는 리투아니아의 맛을 선호했지만 폴란드 요리도 즐겨 찾았습니다. 두 사람이 같은 접시에서 식사해야 한다면, 항상 한쪽은 불만족스러웠을 것입니다.

얀 드우고시는 브와디스와프가 가장 좋아하는 별미 중 하나인 치즈 만두를 왕비는 입에 대지 않았다고 기록했습니다. 왕비는 통밀빵을 좋아하지 않았고, 남편은 당시 사치품이나 다름없던 백색 밀가루로 만든 빵을 싫어했습니다.

물론 두 사람이 함께 즐기는 음식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내장 요리, 통째로 굽는 가금류, 오이, 말린 과일, 견과류는 두 사람 모두 즐겨 먹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중요한 문제에서도 두 사람은 놀랄 만큼 일치했습니다. 저자는 이렇게 적습니다.

야드비가와 야기에우워는 성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노동에 대한 보수가 제때 지급되도록 큰 신경을 썼습니다.

여왕은 이런 문제에 늘 매우 꼼꼼했습니다. 현금이 부족하면 직원들이 손해 보지 않도록 금도금 주전자 같은 물건을 담보로 내놓기도 했습니다. 남편은 처음에는 하인들과의 정산에 덜 신경 썼지만, 왕비의 모범을 따르려고 노력했습니다.

서구풍으로 자란 안주 가문의 여인과 그녀의 거친 리투아니아 남편 사이의 간극은 분명히 존재했습니다. 그러나 과거 역사학자들이 보고자 했던 만큼 깊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적어도 부엌에서 바라본 모습은 그랬습니다.

출처

이 글은 위카 필리포비치의 저서 『왕과 함께한 식탁: 야기에우워부터 엘리자베스 2세까지 왕실 연회의 역사』(즈낙 호리존트 출판사)를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