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이야기

죽은 자의 사진, 머리카락으로 만든 장신구, 종이 달린 관… 빅토리아 시대 장례 산업의 황금기

앨버트 공작이 세상을 떠나자, 빅토리아 여왕은 평생을 애도 속에 보내기로 합니다. 그녀는 '윈저의 과부(Widow of Windsor)'라 불릴 만큼 남편을 잃고 고통받는 아내의 완벽한 본보기가 되었죠. 여왕의 슬픔은 전국으로 퍼져나간 애도 문화에 불을 지폈고, 죽음에 대한 인식을 바꾸었을 뿐만 아니라 전례 없는 규모의 장례 산업 성장을 이끌었습니다.

일상 속에 스며든 죽음

19세기에 죽음은 나이와 사회적 지위를 불문하고 모든 사람의 삶에 밀접하게 존재하는 주제였습니다. 콜레라, 이질, 장티푸스처럼 오늘날에는 쉽게 치료되는 질병들조차 당시에는 환자의 죽음으로 끝나는 경우가 허다했습니다. 출산 중 사망하는 여성의 비율이 높았고, 병원은 물론 일반 가정에서도 아동 사망률이 높았으며 위생 상태 역시 열악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스스로를 독살하기도 했습니다. 치명적인 물질이 함유된 화장품을 사용하거나, 나무 장난감을 칠할 때 납 페인트를 사용하는 식이었죠. 가장 무해해 보이는 물건들이 치명적인 도구로 판명되곤 했습니다.

영국 빅토리아 시대 말기에도 10명의 아이 중 단 2명만이 두 살까지 생존했습니다. 이 비극적인 통계의 원인 중 하나는 고무 호스가 달린 유리 우유병이었습니다. 특유의 구조 덕분에 수유는 편했지만 세척은 어려웠고, 이는 세균과 곰팡이가 번식하기에 완벽한 환경을 제공하며 영아 사망률을 높였습니다.

성인의 통계 역시 낙관적이지 않았습니다. 많은 이들이 50세를 넘기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죽음을 미리 계획하는 일은 누구에게도 낯선 일이 아니었고, 오히려 가족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오가는 화제였습니다.

살아 있는 동안 죽음을 준비하다

당시 많은 사람들은 살아 있는 동안 자신이 영면할 장소는 물론, 입힐 관과 옷까지 직접 골랐습니다. 여성들은 수의(壽衣)를 손수 만들어 결혼 여행 짐속에 넣어두기도 했습니다. 짧은 생(生)은 존엄한 장례를 위한 준비를 필수로 만들었지만, 그만큼 비용이 많이 들었기에 장례 자금을 일찍부터 마련해두는 것이 하나의 유행처럼 번졌습니다.

빅토리아 시대의 산업 혁명은 도시 인구를 급격히 불려넣었습니다. 50년 사이 런던의 인구는 100만 명에서 250만 명 이상으로 폭증했습니다. 도심 부지는 금값을 넘보는 자원이 되었고, 결국 묘지를 도시 외곽으로 이전하기로 결정합니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공원처럼 조성된 광활한 거대 묘지였습니다. 주민들은 이곳을 산책하며 친지의 무덤을 찾아 시간을 보냈죠. 19세기에는 가문의 지위와 부를 과시하는 웅장한 기념비와 영묘의 유행도 함께 찾아왔지만, 모든 이가 그런 사치를 누릴 수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죽은 자의 사진, 머리카락으로 만든 장신구, 종이 달린 관… 빅토리아 시대 장례 산업의 황금기

사진: 퍼블릭 도메인. 고인을 '살아 있는 듯한' 포즈로 담아낸 사망 사진술(mortuary photography)도 이 시기에 발전했습니다.

사회 하층민들은 대패질조차 되지 않은 간소한 관에 안치되어 묘지의 한적한 구역에 묻히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른바 '거지 무덤'에 안장되기도 했는데, 이는 보통 4주간 열어둔 채 17~18구의 시신을 차례로 안치하는 깊은 구덩이였습니다. 관 사이에 흙을 채우지 않는 것이 관행이었으나, 감염성 질환으로 사망한 경우에는 예외적으로 소석회와 얇은 흙 층을 덮어 시신들을 분리했습니다.

애도 문화와 그에 딸린 관습의 대중화는 장례 산업의 번영에도 크게 기여했습니다. 장의사, 묘지 굴착공, 방부 처리사들에게 이야말로 진정한 황금기였습니다. 고인을 필름 위에 '살아 있는 듯한' 포즈로 담아내는 사망 사진술도 발전했고, 애도 기간에 맞는 복장과 장신구를 판매하는 백화점도 생겨났습니다. 애도의 기간은 매우 길어질 수 있었고, 그에 따른 다양한 규칙들이 존재했습니다.

검은 크레페의 시대

애도 기간은 애도하는 이와 고인 사이의 관계뿐 아니라 애도자의 성별에 따라서도 달라졌습니다. 여성은 남편을 위해 최소 2년간 애도해야 했습니다. 이 시기는 '전체 애도(full mourning)'와 '반 애도(half-mourning)'의 두 단계로 나뉘었는데, 미망인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짙은 검정에서 회색으로, 다시 바이올렛과 라벤더 색조의 복장으로 옷을 바꿔가며 입어야 했습니다.

19세기에는 크레페가 애도용 소재로 널리 쓰이게 됩니다. 크레페는 의상뿐 아니라 현관문 장식 등 집안 곳곳에도 사용되었는데, 이는 문을 넘는 방문객에게 격식을 갖춰 행동하고 가족의 슬픔을 존중하라는 신호였습니다.

죽은 자의 사진, 머리카락으로 만든 장신구, 종이 달린 관… 빅토리아 시대 장례 산업의 황금기

장신구에는 종종 고인의 머리카락이 더해져 눈길을 끄는 장식품으로 탈바꿈하거나, 머리카락을 넣어 잠그는 로켓(메달리온) 형태로 착용되기도 했습니다.

여성들은 장신구를 착용할 수 있었지만, 반드시 애도용이어야 했습니다. 가장 인기 있는 소재는 제트(jet), 오닉스, 검은 에나멜이었죠. 장신구에는 고인의 머리카락이 더해져 독특한 장식품으로 만들어지거나, 메달리온 안에 봉인된 채 착용되곤 했습니다. 미망인은 애도 기간 내내 사교 활동에서 물러나야 했으며,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곳은 오직 교회뿐이었습니다.

애도의 에티켓

남성의 사정은 달랐습니다. 많은 남성, 특히 젊은이들은 빠른 재혼이 기대되었기 때문에 규칙이 훨씬 느슨했습니다. 복장도 크게 바뀌지 않았죠. 검은 장갑과 어두운 정장, 모자에 두르는 검은 리본 정도면 충분했습니다.

애도 복장은 장사치들에게 황금 같은 사업이었습니다. 애도가 끝나면 죽음이 다시 문턱을 넘지 않도록 집안의 모든 애도 복장을 처분해야 한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많은 여성들, 특히 상류층 여성들은 애도 기간이 길어질 때마다 새 옷을 사야 했습니다.

죽은 자의 사진, 머리카락으로 만든 장신구, 종이 달린 관… 빅토리아 시대 장례 산업의 황금기

이 모든 복잡한 규칙 속에서 길을 잃지 않도록, 애도자와 고인의 관계에 따라 애도 기간을 정해주는 특별한 규범이 만들어졌습니다. 미망인의 2년을 비롯해, 부모나 자녀를 애도하는 기간은 1년, 조부모와 형제자매는 6개월, 숙부와 숙모는 2개월, 증조부모는 6주, 사촌은 4주였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애도해야 할 기간에 대한 규칙은 있었지만, 애도를 끝내는 정해진 날짜는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많은 이들이 이 단계를 마무리하는 데 충분한 시간을 들였고, 주변 사람들 역시 이를 존중해주었습니다.

덮인 거울과 무덤가의 종

19세기는 의학과 과학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시기였지만, 동시에 매장과 관련된 미신과 공포가 강하게 자리 잡은 시대이기도 했습니다. 의사들은 여전히 연구용 시신을 구하기 어려워했고, 이는 밤을 틈타 묘지에 잠입해 새 무덤을 파헤치는 시신 도굴꾼의 성행으로 이어졌습니다. 또한 많은 질병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아 의사가 실수로 환자를 죽은 것으로 판정하는 일도 종종 있었습니다. 혼수 상태에 빠진 사람들이 무덤 속에서 깨어나는 비극도 벌어졌죠.

이런 참사를 막기 위해 무덤에 경비원이 배치되었고, 시신의 손목에 밧줄을 묶어 그 끝을 무덤 위의 종에 연결해 안장하기도 했습니다. 관에 튜브와 거울을 달아 묘지 굴착공이 관 안의 움직임을 확인할 수 있게 만든 사례도 있었습니다.

고인의 평안한 안식을 보장하고 가족을 지키기 위한 미신들도 존재했습니다. 죽은 자가 '뒤돌아보지' 못하고 다음 사람을 저승으로 데려가지 못하도록, 시신은 발이 먼저 나가도록 집에서 옮겨졌습니다. 고인의 집에서는 장례식이 끝날 때까지 모든 창문과 거울이 덮여 고인의 모습이 갇히지 않도록 했습니다. 시계 역시 죽음의 순간에 멈춰두어 불운을 피했고, 고인의 사진은 남겨진 이들이 고인의 영혼에게 빙의되지 않도록 아래로 뒤집어 두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