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오스트리아 축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였습니다. 황금기 '분데르팀(Wunderteam)'의 가장 빛나는 별이자 당시 모든 팬들의 우상이었던 그는 독일 대표팀 유니폼 입기를 거부했고, 생애 마지막 경기에서 오스트리아 병합, 즉 안슐루스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뚜렷하게 드러냈습니다. 그리고 10개월 후, 그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종이로 만든 남자
마티아스 신들러(Matthias Sindelar)는 체코 비소치나 지방에서 마테이 신델라르(Matěj Šindelář)라는 이름으로 태어났지만, 가족과 함께 곧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으로 이주했습니다. 슬라브계 주민이 많던 파보리텐(Favoriten) 지구에서 자란 그는 성인 커리어 내내 이곳을 연고로 하는 아우스트리아 빈 클럽에서 뛰었습니다.
그는 '종이로 만든 남자(Der Papierene)'라는 별명으로 불렸습니다. 마르고 야윈 몸집 때문이었죠. 하지만 남다른 개인기와 뛰어난 축구 지능으로 그런 약점을 충분히 만회했습니다. 23세에 오스트리아 대표팀에 데뷔한 그는 곧 세계 최강의 팀 중 하나로 성장한 대표팀의 핵심이 되었고, '축구의 모차르트'라는 찬사를 받았습니다.
바로 그 전설적인 분데르팀입니다.
분데르팀(Wunderteam)
다뉴브 분데르팀의 설계자는 신들러와 마찬가지로 체코 출신인 빈의 유태인 후고 마이슬(Hugo Meisl)이었습니다. 축구에 온몸을 바친 인물이었죠. 폴란드의 저명한 축구 작가 스테판 슈첸플레크는 저서 『나의 축구사』에서 그를 이렇게 소개합니다.
후고 마이슬(1881~1937), 축구 역사상 가장 다재다능한 인물 중 하나다. 선수, 심판(1922년 스톡홀름에서 열린 폴란드 대 스웨덴전, 즉 폴란드 대표팀의 첫 승리 경기의 주심), FIFA 활동가, 경기 규칙 공동 제정자, 기자, 오스트리아 축구 협회 사무총장, 그리고 1912년부터 1937년 사망할 때까지 오스트리아 대표팀 감독을 지냈다.
마이슬의 애창작이었던 분데르팀은 1930년대 초 절정에 달했습니다. 거의 무적에 가까운 팀이었습니다. 1932년, 아름답고도 팽팽한 승부 끝에 잉글랜드만이 이 오스트리아를 막아섰을 뿐입니다. 스코어는 4-3.
이 경기의 진짜 주인공은 단연 마티아스 신들러였습니다. 그의 플레이는 까다롭기로 유명한 잉글랜드 관중들을 무릎 꿇려버렸습니다. 여러 잉글랜드 클럽에서 이적 제안이 들어왔지만 그는 모두 거절했습니다. 그는 빈을 사랑했고, 다른 어떤 곳에서도 살 수 없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빈 카페의 왕
분데르팀의 질주는 1934년 이탈리아 월드컵에서 막을 내립니다. 대회 최대 우승 후보였던 오스트리아는 준결승에서 개최국 이탈리아와 격돌했습니다. 슈첸플레크는 이렇게 적습니다.
마침내 우승 후보들이 밀라노 산 시로에서 준결승에서 만났다. 두 시간 전에 큰비가 쏟아졌고, 선수들은 발목까지 진흙에 빠졌다. 이런 조건에서는 빠른 짧은 패스, 이른바 '빈 학파'에 기반한 오스트리아의 경기 방식은 실패가 예정되어 있었다.
1934년의 산 시로, 분데르팀 최대의 굴욕이 빚어진 곳입니다.
경기는 극도로 흉포했습니다. 이탈리아 선수들은 빈 특유의 우아함에 맞서 잔인함 직전까지 가는 거친 플레이로 맞섰고, 결국 1-0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이것이 분데르팀의 황혼이었고, 이후 거의 10년간 올림픽 축구의 판도는 비토리오 포초(Vittorio Pozzo)가 이끄는 이탈리아 선수들이 장악하게 됩니다.
패배에도 불구하고 신들러의 인기는 식지 않았습니다. 온 빈이 그를 사랑했습니다. 잘생기고, 우아하고, 사교성 넘치던 그는 사회 활동에도 적극 참여했고 광고에 출연했으며 영화에 단역으로 등장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삶을 충만하게 누렸고, 빈의 카페에서 보내는 시간을 무엇보다 좋아했습니다. 그는 도시에서 가장 중요하고 인기 있는 인물 중 한 명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사랑하는 빈 위에는 검은 구름이 모여들고 있었습니다.
나치가 빈에 들어오다
1938년, 독일은 오스트리아를 병합합니다. 많은 빈 시민들은 환희에 겨워 나치를 맞이했습니다. 『나의 축구사』에는 "신들러의 어머니는 국가사회주의를 지지했고, 빈에 입성하는 국방군 부대에게 길거리에서 꽃을 던지며 환영했을 것이다"라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아들은 새로운 현실의 반대편에 서 있었습니다. 그는 사회민주당 지지자였고 유태인 친구가 많았으며, 도시를 뒤덮은 갈색 물결이 그의 성미에 전혀 맞지 않았습니다.
후고 마이슬은 드리블이 아닌 패스 중심의 경기야말로 승리의 열쇠라고 확신했습니다.
독일과 오스트리아 대표팀이 통합될 때, 신들러는 당시 제3제국 대표팀 감독이었던 제프 헤르베르거(Sepp Herberger)의 팀에서 뛰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헤르베르거는 한때 독일을 월드컵 우승으로 이끌 것으로 기대받던 인물이었죠. 신들러는 나이와 건강 문제를 핑계로 이를 피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국제 경기에 한 번 더 모습을 드러냈는데, 이 경기는 역사에 '안슐루스 경기(Anschlussspiel)'로 기록됩니다.
안슐루스 경기(Anschlussspiel)
프라터 경기장에서 열린 친선 경기에서, 대표팀과 작별하는 오스트리아 선수들이 독일과 맞붙었습니다. 관중들은 외교적 무승부를 예상했습니다. 홈팀인 오스트리아가 크게 우세했는데도 결정적 찬스를 계속 낭비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일부러 과시하듯 기회를 흘려보냈습니다. 신들러와 동료들은 독일을 이기는 것이 새 정권이 반길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후반 70분, 스타는 모두를 놀라게 했습니다. 상대 골문을 열어젖힌 것입니다. 오스트리아가 2-0으로 승리했고, 신들러는 나치 요인들이 앉은 명예석 앞에서 도발적인 기쁨의 춤을 추었습니다. 10개월도 지나지 않아 그는 죽었습니다.
1938년 3월, 빈에서 독일군을 환영하는 오스트리아인들의 모습(사진: Bundesarchiv, Bild 146-1985-083-10 / CC-BY-SA).
연인과 함께 침대에서 발견된 시신
1939년 1월 23일, 신들러와 유태계 이탈리아인 연인 카밀라 카스타뇰라(Camilla Castagnola)는 안나가세(Annagasse)의 한 아파트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습니다. 충격적이고 비극적인 소식은 빠르게 빈 거리로 퍼져나갔고, 즉시 수많은 소문과 추측을 낳았습니다. "법의관은 사인이 사고로 인한 일산화탄소 중독이라고 밝혔다"고 슈첸플레크는 적습니다.
선수의 많은 친구들은 공식 발표를 믿지 않았습니다. 이후 축구 천재의 미스터리한 죽음을 설명하는 수많은 이론과 가설이 등장했습니다. 가장 자주 언급되는 것은 나치의 보복입니다. 도시에서 워낙 인기가 높았던 신들러는 나치에게 점점 더 커다란 골칫거리가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종이로 만든 남자'는 모든 골키퍼의 공포였습니다.
또 다른 버전도 자주 등장합니다. 은퇴와 나치의 고향 침략 이후 깊어진 우울증으로 인해 신들러가 자살했다는 것입니다. 배신당한 연인의 복수 같은 더욱 기이한 가설들도 있습니다. 오스트리아 최고의 축구선수의 죽음에 대한 미스터리는 지금도 풀리지 않은 채 남아 있습니다.
출처
스테판 슈첸플레크, 『나의 축구사』 1권 「세계」, 시네콰논(Sine Qua Non) 출판사, 크라쿠프 2015.
필자는 자신의 축구사 집필 과정에서 수집한 자료도 함께 활용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