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시칠리아의 도시들을 약탈하며 주민들을 공포에 떨게 하는 무법 국가를 세웠다. 유명한 피로스마저 격파했던 이들은 이윽고 역사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그 전에, 제1차 포에니 전쟁이라는 큰 불길을 지핀 도화선이 되었다. 마메르티네스는 대체 누구였을까?
분쟁의 근본적인 원인을 추적하는 일은 어렵지만, 불을 지핀 불꽃이 된 직접적인 사건들은 대체로 더 명확하다. 1914년 사라예보에서 프린치프가 페르디난트 대공을 암살하며 유럽 전체를 제1차 세계대전으로 몰아넣은 사건이 대표적인 예다.
카르타고와 로마의 전쟁에서 이러한 '불꽃'은 시칠리아의 메사나(오늘날의 메시나)에서 일어났다. 이는 시라쿠사이의 참주 아가토클레스가 기원전 315~312년경 이 지역을 공격하며 시작된 그의 야심 찬 경력에서 비롯된 결과물이었다.
오랫동안 카르타고인들과 싸우며 시라쿠사이의 영향력을 확장해 온 아가토클레스는 수많은 용병을 고용했다. 그의 군대에는 캄파니아 출신 용병 부대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들은 5세기 말 비옥한 평야로 진출했던 산악 부족의 후손으로, 오스크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었다.
화신 마르스의 전사들
기원전 289년 아가토클레스가 죽은 뒤 시라쿠사이는 정치적 혼란에 빠졌고, 이 용병 집단은 새로운 고용주를 찾지 못했다. 그러던 중 어느 시점에 이들은 '친구'로서 메사나에 들어가는 것을 허락받았지만, 배신적으로 주민들을 학살하고 그들의 아내와 재산을 강탈했다.
이 도시를 거점으로 삼은 그들은 인근 지역을 약탈하고 다른 공동체들에게 공납을 강요하며, 섬의 혼란스러운 상황을 득세의 기회로 삼았다. 군사적 위상을 과시하기 위해 그들은 스스로를 '마메르티네스', 즉 로마인들이 마르스로 숭배하던 이탈리아의 전쟁 신 마메르스의 추종자들이라 칭했다.

메사나(오늘날 메시나)는 시칠리아 북동부 해안, 섬과 이탈리아 본토를 가르는 좁은 해협에 위치해 있다. 건너편 이탈리아 해안에는 로마와 동맹을 맺은 레기움(오늘날 레조)이 있었는데, 이 도시는 피로스의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지켜줄 것을 요청하며 로마 수비대를 받아들였다. 로마는 계급이 불분명한 장교 데키우스의 지휘 아래 4천 명의 병력을 파견하며 응했다.
로마에서 투표권만 없을 뿐 그 외의 모든 면에서 로마 시민이었던 이 병사들 역시 오스크어를 쓰는 캄파니아 출신이었다. 메사나의 동포들에게서 영감을 받은 그들 역시 보호해야 할 도시를 배신해 남성 인구를 살해하거나 쫓아내고 그들의 재산을 차지했다.
당시 피로스와 타란토와의 전쟁에 몰두하고 있던 로마는 이 배신 행위에 즉각 응징할 여유가 없었고, 기원전 271년에야 군대가 남진해 레기움을 포위했다.
죄와 벌
타란토의 함락으로 로마는 그리스인이 압도적으로 많은 이탈리아 남부에 대한 지배를 확고히 했다. 따라서 새로운 동맹국들에게 로마의 fides(신의·신뢰)에 대한 이런 배신이 처벌 없이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일이 더욱 중요해졌다.
긴 포위전 끝에 이 지역은 진압되었고, 생포된 300명의 캄파니아인들은 공개 처형을 위해 로마로 압송되었다. 그곳에서 이들은 국가를 배반한 시민으로서 포룸에서 채찍질당한 뒤 참수되었다. 한 기록에 따르면 눈이 멀었던 데키우스는 감시가 허술한 틈을 타 최후를 맞이하기 전에 자살했다고 한다. 이 무렵까지 로마는 메사나와는 아무런 관계도 접촉도 없었다.

마메르티네스는 피로스가 시라쿠사이의 호소에 응해 섬의 그리스 도시들을 방어하러 시칠리아로 짧고 화려했지만 결국 실패한 원정을 떠났을 때, 그의 카르타고 원정에 가담하지 않았다. 그러나 메시나 해협 너머의 동맹을 잃은 그들은, 시라쿠사이에 새로운 지도자가 등장하면서 점점 더 커지는 압박에 직면하게 되었다.
히에론은 이탈리아계 침략자들과의 전쟁으로 명성을 얻은 재능 있는 군인이자 수완가 정치가였다. 처음에는 군대의 추대로 권력에 올랐지만, 도시의 유력 정치인 중 한 명의 딸과 결혼하며 입지를 더욱 굳혔다.
권력의 몰락
마메르티네스에 대한 히에론의 원정 연대기는 정확하지 않지만, 여기서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키아모소루스 강에서 벌어진 첫 전투에서 그는 신뢰할 수 없는 용병 부대를 일부러 죽음으로 내몸며 적을 저지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아마도 기원전 268년에서 기원전 265년 사이에 롱가누스 강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는데, 이때 그는 메사나 출신 원주민 부대와 시라쿠사이 정예 부대를 적진 뒤편에 매복시켜 활용했다.
마메르티네스의 세력은 꺾였다. 외부의 지원 없이는 살 길이 없다고 판단한 그들의 지도자들 — 폴리비오스에 따르면 지도부 내 두 파벌이 각각 — 은 기원전 265년 로마와 카르타고 양측에 사절을 보내 도움을 청했다.

이 사건들의 정확한 순서 역시 분명하지 않다. 다만 카르타고가 먼저 움직였고, 시칠리아 주둔 지휘관 중 한 명이 상징적인 병력을 보내 메사나 성채를 장악했다는 사실은 알려져 있다. 한 전승에 따르면, 한니발이라는 이름의 이 장교는 우연히 근처 에올리아 제도 연안에 함대와 함께 있었다. 그는 승리를 축하한다는 명목으로 히에론의 진영으로 달려갔는데, 실제 목적은 그의 공세를 충분히 지연시켜 마메르티네스가 동맹을 수락하고 카르타고 수비대를 받아들이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히에론은 카르타고와의 정면 충돌을 원하지 않았기에 시라쿠사이로 물러났다. 이는 또 하나의 포에니식 교활함에 대한 이야기일 수 있다. 폴리비오스는 이를 언급하지 않지만, 그의 기록과 반드시 모순되는 것은 아니다.
카르타고가 이 분쟁에 개입한 것은 전혀 이상할 게 없다. 그중 가장 부유하고 강력한 도시였던 시라쿠사이는 수세기에 걸친 시칠리아 지배권 다툼에서 그리스 도시들의 저항을 줄곧 이끌어 왔다. 시칠리아 그리스인들을 공격한 또 다른 외세 집단을 소멸시킨 영광을 안은 강력한 참주가 다시 등장하는 것은 분명 바람직하지 않았다.
메사나에 대한 통제권, 곧 이탈리아로 통하는 가장 직접적인 경로의 장악은 카르타고의 힘을 크게 강화했다. 일부 후대 기록들이 주장하듯 이것이 필연적으로 시라쿠사이의 최종 정복, 나아가 시칠리아 전역의 정복 완수로 이어졌을지는 여전히 논쟁의 여지가 있다.
출처
이 글은 아드리안 골즈워디의 저서 『카르타고의 몰락: 포에니 전쟁의 역사』(레비스 출간)에서 발췌한 내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