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미국에서는 신체나 외모가 특이한 사람들에게 '사이드쇼(freak show)'라는 이름의 피난처가 있었다. 서커스와 박람회장에서 열린 이색 공연은 그들에게 안식처와 동시에 생계를 벌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하지만 '살아있는 해골'로 불렸던 한 남자의 이야기는 화려한 무대 뒤에 숨겨진 비극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평범하던 소년기, 그리고 급격한 변화
아이작 W. 스프라그(Isaac W. Sprague)는 1841년 5월 21일 매사추세츠주 이스트브리지워터에서 태어났다. 열두 살 무렵까지 그는 또래 아이들과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소년이었다. 건강했고 발육도 정상적이었다.
그러나 12번째 생일을 맞은 후 모든 것이 달라졌다. 아이작은 잦은 근육 경련(특히 수영 후 심했다)을 호소하기 시작했고, 늑대 같은 식욕에도 불구하고 눈에 띄게 살이 빠졌다. 걱정이 된 부모는 아들의 병명을 찾기 위해 여러 주(州)의 의사들을 찾아다녔다. 하지만 당시 의학으로는 진단을 내릴 수 없었다. 어떤 의사는 아이작의 문제가 '수영을 너무 많이 해서'라고까지 말할 정도였다.
뼈만 남은 삶
성인이 된 아이작은 키 168cm에 몸무게가 약 19~19.5kg에 불과했다. 병 때문에 그는 조금이라도 육체적인 힘이 드는 일은 전혀 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생계는 꾸려야 했다. 그래서 구두공이었던 아버지에게 직업을 배웠고, 잡화점 운영도 도왔다. 그러나 두 작업 모두 그에게는 너무 지치는 일이어서 온전히 헌신할 수 없었다.

성인이 된 후에도 키 168cm에 몸무게는 약 19~19.5kg에 머물렀다.
1860년대 초 부모를 잃으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이것이 마지막 타격이 되어 아이작은 다른 생계 수단을 찾아야만 했다. 그렇게 선택한 것이 박람회장 등에서 열리는 사이드쇼, 즉 서커스 공연과 기이한 인물들을 선보이는 쇼였다.
'살아있는 해골'이라 불리다
아이작 스프라그는 '살아있는 해골(living skeleton)', 혹은 '원조 마른 사나이'로 홍보되기 시작했다. 의도적으로 굶어 몸을 말린 다른 출연자들과 달리, 그의 마른 몸은 질병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스프라그의 병은 유명 흥행사 P.T. 바넘(P.T. Barnum)의 주목을 빠르게 끌었다. 바넘은 그를 뉴욕 중심가에 있는 바넘 아메리칸 박물관으로 초청했고, 상당히 후한 급여를 제안했다. 주급 80달러, 오늘날 가치로 약 1,500달러였다.

1924년 링링 브라더스 서커스의 '괴물들의 회의(Congress of Freaks)' 단원들
이렇게 스프라그는 수염 난 여인들과 거인들 사이에 자리 잡고, '살아있는 해골'을 보고 싶어 하는 호기심 많은 구경꾼들을 매료시켰다. 바넘 박물관에서의 경력은 1868년 3월까지 이어졌다. 그해 이 특별한 볼거리의 집이던 건물이 화재로 소실되었고, 아이작 자신도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이 사건 이후 그는 연예계에서 잠시 물러나기로 했다.
잠시 찾아온 가족의 행복
매사추세츠로 돌아간 그는 타마 무어(Tamar Moore)를 만났고, 곧 결혼했다. 결혼 생활은 처음에는 순탄하고 평화로웠다. 건강한 아들 셋까지 두었다. 아이작은 이 시기를 두고 "때로는 지킬 가치가 없어 보였던 삶이 이제는 더욱 소중해졌다"고 말했다.
스프라그가 마침내 행복을 찾은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착각이었다. 일상의 문제들은 곧 그에게 되돌아왔고, 가장 큰 문제는 평범한 직업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이었다. 어떤 활동이든 19kg짜리 몸이 감당할 수 없는 에너지를 필요로 했다.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현실은 그를 다시 바넘 앞으로 내몰았다. 이번에는 흥행사가 그를 문팔이식 순회 공연에 합류시켰다. 아이작은 미국뿐 아니라 캐나다, 영국, 유럽 전역에서 관객들을 즐겁게 만들었다.
성공의 대가
인기는 여전히 식을 줄 몰랐지만, 스프라그 본인은 서커스 생활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여러 차례 다른 직업을 찾았다. 그러나 병은 점점 몸을 쇠약하게 만들며 최소한의 영양분조차 섭취하기 어렵게 했다. 아이작은 금방 지쳤고, 실신하는 일도 잦아졌다. 이를 막기 위해 그는 목에 단 우유 병을 걸고 다녔다. 덕분에 하루 종일 몸에 영양을 공급할 수 있었다.

1882년 여러 차례의 검사 끝에 아이작은 마침내 근위축증 진단을 받았다. 사진 속 로자 리 플레먼스(Rosa Lee Plemons)도 같은 병을 앓았다.
건강 악화와 함께 재정 상황도 나빠졌다. 스프라그는 고민을 잊으려 도박에 손을 댔다. 그러나 운은 따르지 않았고, 그 대가는 큰 빚이었다. 빚은 그의 운명을 봉인했다. 기이한 볼거리로서만 적당한 돈을 벌 수 있었기에, 그는 서커스에서 일할 수밖에 없었다.
늦게 밝혀진 진단
세월이 흐르면서 의학을 포함한 여러 분야에도 변화가 찾아왔다. 1882년, 수차례의 검사 끝에 아이작은 마침내 근위축증(muscular atrophy) 진단을 받았다. 근육 조직이 공격적으로 위축되는 병이었다. 그러나 진단이 곧 치료를 의미하지는 않았다. 하버드 의과대학 의사들이 내놓을 수 있는 것은 사후에 시신을 연구에 기증해 주면 1,000달러(오늘날 가치로 약 3만 달러)를 주겠다는 제안뿐이었다. 어쨌든 시간이 보여주듯 아이작의 끝은 정말 가까워 있었다.
지속적인 스트레스와 제대로 된 영양 섭취의 부재는 곧 스프라그의 목숨을 앗아갔다. 그는 1887년 1월 5일 시카고에서 세상을 떠났다. 깊은 빈곤 속에서였다. 그의 시신이 실제로 하버드 의과대학에 넘어갔는지는 알 수 없다. 오늘날 그의 묘는 아내의 고향인 매사추세츠주 핸슨(Hanson)에서 찾아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