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8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폭탄이 일본의 항복을 몰고 왔다는 것이 정설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과연 사실일까? 태평양 전쟁을 끝낸 진짜 요인은 무엇이었는지 함께 살펴보자.
세계사에는 왜곡과 축소된 기록이 넘친다. 때로는 확실한 사실로 여겨진 것들이 실제와 거리가 멀기도 하고, 반대로 너무 기괴해서 믿기 어려운 사건이 가장 현실적인 경우도 있다. '진실 혹은 신화' 시리즈에서는 이러한 역사적 신화들을 하나씩 검증해 본다. 역사는 겉으로 보이는 것만큼 단순하지 않다.
일본 도시에 대한 폭격
1944년 8월 10일, 괌 전투가 막을 내렸다. 그해 초여름 미군은 이미 티니안과 사이판에서 일본군을 격파한 상태였다. 이 세 섬은 마리아나 제도를 이루며, 태평양에서 싸우는 열강들에게 매우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일본이 카미카제(특별공격대)를 처음으로 동원한 곳도 바로 여기였다는 점이 그 중요성을 잘 보여준다. 그러나 조종사들의 자살 공격조차 미군의 공세를 막지 못했다.

사진. Ishikawa Kouyou / 퍼블릭 도메인. 도쿄 대공습으로 약 10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추정된다.
마리아나 제도가 전쟁의 향후 전개에 중요했던 이유는 일본 본토와 충분히 가까워 현지 도시들을 폭격할 수 있는 거리였기 때문이다. 역사상 최대 규모의 폭격 작전인 '미팅하우스 작전(Operation Meetinghouse)'은 바로 티니안 섬에서 시작되었다. 도쿄 대공습으로 약 10만 명 이상이 사망한 것으로 추산되는데, 이는 히로시마나 나가사키에 대한 핵공격 당시의 사망자 수보다 많은 숫자다.
전선이 일본의 심장부로 이동하면서 일본 경제, 군수 산업의 생산 능력, 그리고 민간인들의 삶은 파괴적인 타격을 입었다.
오키나와에서 패배한 일본
미군의 오키나와 점령은 일본의 전투 의지를 꺾어놓았다. 일본 함대 최강의 전함이었던 야마토가 섬 방어전에서 격침되면서 일본의 패색은 더욱 짙어졌다. 1945년 4월 1일부터 6월 21일까지 벌어진 극도로 참혹하고 격렬한 전투에서 약 2만 명의 미군 병사와 7만 명이 넘는 일본군 병사가 목숨을 잃었다. 섬 주민 약 3만 명도 희생되었다.
오키나와는 일본 본토를 지키는 마지막 보루였다. 필사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섬이 함락되자 일본인들은 마침내 승리를 믿지 않게 되었다. 지휘관들은 더 이상 전쟁의 목표가 승리가 아니라, 조국에 가능한 한 유리한 강화 조건을 만드는 것임을 깨달았다.
소련의 만주 침공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일본의 구상 중 하나는 소련을 중재자로 활용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1945년 8월 초, 소련은 일본 외교관들과의 접촉을 서서히 줄여갔다. 이는 며칠 뒤 일어날 사건의 전조였다.

포츠담 회담 직후인 1945년 8월 8일, 주소련 일본 대사가 크렘린으로 소환되었다. 뱌체슬라프 몰로토프는 그에게 선전포고문을 건넸다. 다음 날, 소련군은 만주를 침공했다. 당시 스즈키 간타로 총리는 나가사키 폭격 소식을 기다리지 않고도 "이제 게임은 끝났다"며 상황이 재앙적이라고 판단했다.
방어조차 준비할 수 없는 나라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피할 수 있었던 마지막 희망은 연합군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손실을 안겨 강화 조건을 완화하는 것이었다. 민간인들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핵공격의 잔혹한 결과를 몸소 겪는 가운데, 일본 정부 최고위층에서는 일본 열도를 미국의 상륙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한 전략 계획인 '케츠고(Ketsu-Go)' 작전이 진지하게 논의되었다. 이 작전 시나리오는 민간인까지 동원해 사용 가능한 모든 무기를 총동원하여 적에게 진짜 피바다를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미군 참모부가 작성한 추산에 따르면, 일본 상륙 작전(폴 다운 작전)에서 발생할 손실은 수백만 명에 달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그러나 일본이 해안 방어 준비에 착수하자, 계획의 기본 전제조차 실행할 수 없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끊임없는 공습에 시달리고 굶주림에 허덕이던 민간인들은 전쟁에 지쳐 있었다.

미군 참모부의 추산에 따르면 일본 상륙 작전(폴 다운 작전)의 손실은 수백만 명에 이를 것으로 예상되었다.
정부는 국민들의 반란을 진지하게 우려하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방위 관련 공장은 크게 파손되어 무기를 생산할 수 없는 상태였다. 이러한 명백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군부는 여전히 준비를 계속하라고 주장했다. 1945년 8월 13일, 히로히토 천황이 일본의 미래를 놓고 벌어진 논의에 직접 개입하지 않았더라면 역사가 어떻게 흘러갔을지 알 수 없다.
히로히토 천황의 결단
일본 천황은 이론상 국가의 최고 존재였지만 실질적인 정치 권력은 없었다. 1944년부터 나라를 통치한 것은 최고전쟁지도회의, 이른바 '빅 식스(Big Six)'였다. 1945년 8월 초 이 회의는 군부 대표 4명, 스즈키 간타로 총리, 그리고 도고 시게노리 외무상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일본 천황은 이론상 국가의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지만, 실질적인 정치 권력은 없었다.
8월 13일 회의는 교착 상태에 빠졌다. 회의 멤버 중 세 명은 연합국이 히로히토 천황의 권한을 보존해 주는 조건이라면 강화 조건을 수용하는 데 동의했다. 나머지는 더 큰 양보를 요구하거나 마지막 한 방울의 피까지 싸우자고 주장했다. 이 교착 상태를 깬 것은 다름 아닌 천황 자신이었다. 그동안 물러나 있으며 소극적이었던 히로히토는 나라의 운명이 걸린 순간, 이렇게 말했다.
나는 국내외 정세를 진지하게 고민한 끝에 전쟁을 계속하는 것은 오직 국가의 멸망을 의미할 뿐 아니라 세계의 피흘림과 잔혹함을 연장하는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 무고한 백성들이 더 이상 싸우는 것을 차마 볼 수 없다. 전쟁을 끝내는 것이야말로 세계에 평화를 되찾고, 끔찍한 고통에 시달리는 국민을 해방시키는 유일한 길이다.
전쟁의 끝
미국은 일본의 항복 의사에 대해 애매한 반응을 보였다. 미국이 천황의 왕좌 유지를 보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히로히토는 최고회의에 다시 한번 강화 조건의 수용을 요청했다. 1945년 8월 14일의 감정적인 담화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우리 겨레가 재로 변한다면, 조상들의 영혼에게 어떻게 답하겠는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대한 핵공격은 일본의 항복 결정에 미미한 영향을 미쳤다.
핵공격이 일본의 항복 결정에 미친 영향은 생각보다 미미했다. 핵무기의 위력은 오늘날 알려진 것만큼 일본 군부를 압도하지 못했다. 그들은 잘 조직된 방공 체계만 갖추면 이런 유형의 추가 공습도 무력화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진실은 1944년 중반 이후 일본의 상황이 매달 악화되어 왔다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패배들로 인해 일본인들이 고민한 것은 전쟁에서 이길 수 있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크게 패배하느냐였다. 항복 직전 며칠간 정부의 최대 관심사는 미국이 히로히토에게 황제의 지위를 유지해 줄 것인가였지, 미국의 무기고에 '핵폭탄'이 몇 개나 남았느냐가 아니었다.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 본인도 훗날,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폭탄이 투하되지 않았더라도 일본은 1945년 8월 말까지 항복했을 것이라고 인정했다.
핵폭탄이 일본의 항복을 강요했다? — 신화다.
참고 문헌
- Craig, The Fall of Japan. The Final Weeks of World War II in the Pacific, New York 2015.
- Tillman, Whirlwind: The Air War Against Japan 1942–1945, New York 2010.
- Dower, Embracing Defeat: Japan in the Wake of World War II, New York 2000.
- Kozieł, Hiroshima: the crime of the State Department, "Rzeczpospolita" (2021년 11월 27일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