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와 광기, 명예욕과 절대권력
천재와 광기는 한 걸음 차이일까? 명예를 향한 갈망과 절대권력이 결합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20세기 초 소련에서 벌어진 과학자들의 이야기는 그 질문에 대한 가장 충격적인 답변이다. 인간의 생명을 지배하려는 '신과의 경주'에 뛰어든 이들은 끝내 세계 과학계의 웃음거리로 전락하고 만다.
공산 정권과 맺은 위험한 계약
20세기 첫 수십 년, 소수의 천재와 기성 학계에 어울리지 못한 교수들, 그리고 과학적 사기꾼들이 공산주의 정권과 거래를 맺었다. 목표는 단 하나였다. 스탈린이 다스리는 러시아를 세계 초강대국으로 변모시키는 것.
정부는 이들에게 연구의 자유와 영광이라는 달콤한 제안을 건넸다. 그 제안을 받아들인 과학자들의 명단은 실로 파란만장하다.
- 일리야 이바노프(Ilya Ivanov) — 침팬지에게 인간의 정자를 주입해 인수(人獸) 잡종을 만들려 시도했던 생물학자
- 트로핌 리센코(Trofim Lysenko) — 유전학 자체를 부정하며 '신 노릇'을 하겠다던 농학자
- 알렉산드르 보그다노프(Alexander Bogdanov) — 자신이 진행한 수혈 실험의 희생자가 되어버린 의사이자 혁명가
- 올가 레피에신스카(Olga Lepieszynska) — 탄산수소나트륨(소다) 목욕이 젊음을 되살린다고 주장했던 인물
스탈린 자신도 '과학자'였다
영국 작가 사이먼 잉스(Simon Ings)의 저서 『스탈린과 과학자들』(Agora 출판사, 2017)은 이처럼 스탈린의 밑에서 세계의 웃음거리가 된 광인들로 변해버린 과학자들의 이야기를 생생하게 그려낸다.
흥미롭게도 이 책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스탈린 자신이다. 그는 추운 기후에서 레몬 재배를 강행했고,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을 직접 '교정'했으며, 언어학에 관한 우스꽝스러운 논문까지 집필했다. 권력자가 과학을 지배하는 순간, 과학은 더 이상 과학이 아니다.
단순한 가짜 과학의 역사가 아니다
하지만 이 책이 단순히 터무니없는 의사(擬似)과학 실험의 목록을 나열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것은 수백만 명의 기근·전염병·대숙청·전쟁 희생자를 대가로 과학자들이 권력 구축에 동원되었던 역사이기도 하다.
책은 또한 복잡한 운명과 모호한 선택 앞에 선 개개인의 과학자들을 조명한다. 그들이 마주한 선택지는 극단적이었다. 자신의 지식으로 악에 봉사할 것인가, 아니면 생명을 구할 것인가. 그리고 과학이 정치의 종이 되었을 때 어떤 남용과 범죄가 필연적으로 뒤따르는지 보여준다.
권력 앞에서 무너진 과학의 양심
리센코가 유전학자들을 박해하며 소련 생물학을 수십 년 뒤처지게 만든 '리센코주의', 이바노프의 서아프리카 잡종 실험 스캔들, 보그다노프가 목숨을 걸고 시작한 수혈 연구 — 이 모든 사건은 하나의 공통된 교훈을 남긴다. 국가 권력이 진실보다 이념을 우선하는 순간, 과학은 인류를 위한 도구가 아니라 인류를 해치는 무기가 된다는 것이다.
『스탈린과 과학자들』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경고를 던진다. 과학의 자율성이 침해될 때 무엇이 사라지는지, 그리고 그 대가를 누가 치러야 하는지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