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란드 출신 바이러스학자 힐러리 코프로프스키는 맹위를 떨치던 전염병으로 인한 장애와 죽음으로부터 수백만 명을 구해냈습니다. 그의 확고한 의지 덕분에 세상은 생명을 살리는 백신을 손에 넣었습니다. 하지만 돌파구가 되는 발견으로 가는 길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윤리적으로도 심각한 문제가 있었죠. 무슨 일이든 서슴지 않던 이 연구자는 나아가 방어력 없는 장애 아동들까지 대상으로 실험을 감행했습니다.
힐러리 코프로프스키(Hilary Koprowski)는 다방면에서 재능을 지닌 인물이었습니다. 피아니스트로서의 커리어를 꿈꿨지만, 결국 바이러스학자의 길을 걷게 되었죠. 다행히도 이 선택은 수백만 명의 아이들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의 백신 덕분에 아이들은 소아마비(하이네-메딘병)의 치명적인 후유증으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었으니까요.
그러나 이러한 성공은 폴란드 출신 연구자의 강한 의지, 그리고 과학 실험의 윤리 같은 '관례'에는 눈감아 주려는 태도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당시 그의 제자 중 한 명은 훗날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처음부터 분명했던 것은 코프로프스키가 어떤 식으로든 통제될 수 있는 유형의 사람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만약 누군가 이런 성격의 인물을 고용한다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모든 권한을 넘겨주고 내버려두는 것뿐이다.
실제로 미국 시아나미드(American Cyanamid) 콘글로머릿의 제약 부문인 레더레 연구소(Lederle Laboratories)에서 그의 상사였던 저명한 바이러스학자 헤럴드 콕스(Herald Cox)는 정확히 그렇게 했습니다. 자유롭게 연구에 몰두할 수 있게 된 코프로프스키는 필사적인 작업에 매진했습니다. 민간 기업 소속이었기에 엄격한 학계 규율에 얽매이지 않을 수 있었죠. 회사의 목표는 단순했습니다. 안전하고 무엇보다 수익성 높은 백신을 최대한 빨리 개발하는 것이었습니다.
척수와 뇌, 그리고 바이러스로 만든 '칵테일'
코프로프스키는 쥐를 대상으로 실험을 시작했습니다. 1947년, 그는 설치류의 두개골에 직접 2형 소아마비 바이러스 균주를 주사한 뒤, 감염된 동물의 뇌를 생리식염수와 혼합해 '국물'을 만들어 면화쥐에게 투여했습니다. 이 과정을 여러 번 반복한 끝에 적절히 약독화된 병원체를 담은 칵테일을 완성해냈습니다.
그는 이 혼합물을 아홉 마리 침팬지에게 먹인 뒤, 소아마비 바이러스에 감염시켰습니다. 어느 동물도 증상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폴란드 출신 연구자에게 이것은 자신의 백신 효능을 입증하기에 충분한 증거였습니다. 데이비드 M. 오신스키(David M. Oshinsky)의 기록에 따르면:
코프로프스키의 다음 단계는 과학 연구의 중요하지만 문서로 남지 않은 규칙이었다. 경구용 백신을 다른 사람에게 시험하기 전에 먼저 자기 자신에게 시험해 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코프로프스키의 연구는 윤리와는 거리가 멀었지만, 놀라운 성과를 가져왔습니다
코프로프스키는 1948년 자기 몸으로 직접 시험했습니다. 늦겨울 오후, 그는 조수 토머스 노턴(Thomas Norton)과 함께 워긴 믹서를 사용해 '소아마비 칵테일'을 만들었습니다. 그 안에서 그들은 척수 조각과 쥐의 뇌 조직을 '기름진 슬러시'처럼 섞어냈습니다.
이 역겨운 물약을 마신 후에도 두 사람 모두 병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코프로프스키는 또 한 번의 성공을 거두며 다음 단계, 즉 인체 대상 연구로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실탄 수류탄 가지고 놀기'
1950년, 과학자는 생바이러스로 만든 자신의 제제를 아이들에게 '투여'했습니다. 살아있는 '실험 대상'은 레치워스(Letchworth)에 있는 '정신 지체 및 간질' 아동 국영 수용시설의 어린 아이들이었습니다. 데이비드 M. 오신스키는 이렇게 기술합니다:
코프로프스키는 시설 원장 조지 저비스(George Jervis)와 친분이 있었다. 두 사람은 한때 함께 일한 적도 있었다. 코프로프스키에 따르면, 저비스 박사는 공공의 안전을 위해 레치워스에서 자신의 소아마비 백신을 시험해 달라고 애원했다고 한다. 그는 시설의 아이들이 자기 배설물을 가지고 장난을 치고 건물 곳곳에 던지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코프로프스키의 전기 작가 로저 본(Roger Vaughan)은 시설의 상황을 '실탄 수류탄을 가지고 노는 것'에 비유했습니다. 그래서 폴란드 출신 연구자는 '면역력 없는 자원자'에게 제제를 투여하는 데 망설임 없이 동의했습니다.
문제는 이른바 '자원자'들이었습니다. 총 스무 명의 아이들에게 초콜릿 우유에 녹인 감염 물질 한 큰술씩을 먹였는데, 그중 두 명은 혼자 삼킬 수 없어 위까지 이어지는 관을 통해 투여했습니다! 게다가 코프로프스키나 저비스가 접종 대상 아이들의 부모로부터 동의를 받았는지조차 불분명합니다. 두 해 후 폴란드 출신 연구자가 연구 결과를 발표했을 때, 학술지 '랜싯(The Lancet)'이 실은 논평을 보면 충분합니다:
영어의 풍부함은 어떤 단어들의 의미가 끊임없이 변한다는 데에도 있다. 예컨대 '자원자(volunteer)'라는 단어 말이다. 우리는 훗날 과학 저널에서 스무 마리의 '자원한' 쥐를 대상으로 실험이 진행되었고, 역시 자원한 스무 마리의 쥐가 대조군을 이루었다는 문장을 읽게 될지도 모른다.
윤리 따위는 필요 없다
여러 해 후 코프로프스키는 이렇게 인정했습니다: "만약 지금 그런 시험을 했다면 우리는 감옥에 갔을 것이고, 회사는 소송에 시달렸을 겁니다." 다행히도(연구자 본인에게도), 그의 방법은 효과적이면서도 안전한 것으로 판명되었습니다. 폴란드 출신 연구자가 개발한 백신은 소아마비와의 싸움에서 강력한 무기가 되었습니다.
2007년의 힐러리 코프로프스키
1958년에는 콩고의 25만 명 어린 환자들이 임상 시험 차원에서 이 제제를 접종받았습니다. 코프로프스키 덕분에 900만 회분의 백신이 폴란드에도 공급되었습니다. 마르친 마르친스키(Marcin Marczyński)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접종 후 효과는 즉각 나타났고, 백신 덕분에 환자 수가 급격히 줄었습니다. 1959년에는 1천 명이 넘는 아이와 영아가 바이러스에 감염되었지만, 1963년에는 겨우 30명의 아이들만 감염되었습니다. 하이네-메딘병 발생률은 매년 수백 건에서 2건으로 떨어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프로프스키는 폴란드 아이들을 실험용 쥐처럼 사용했다며 공산당 정권의 비판을 받았습니다(이 때문에 1990년대 말까지 소아마비 백신 발명자는 폴란드에서 사실상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뭐, 이 경우에는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 셈입니다…
참고 문헌
- M. Marczyński, A. Pękacz, Hilary Koprowski – Polish physician, virologist and immunologist, "Humanum" 28 (1)/2018, pp. 119–123.
- D. M. Oshinsky, Polio. The story of overcoming Heine-Medina disease, Prószyński i S-ka, Warsaw 2015.
- R. Vaughan, Tacts and Facts. The Life of Hilary Koprowski, Poznań Publishing House, Poznań 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