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에도 여전히 뜨거운 논쟁거리인 피임 문제는 사실 그리스 철학이 황금기를 누리던 시절부터 이미 활발한 토론의 대상이었습니다.
빈곤과 출산 통제를 잇는 오랜 관심
현재 여러 나라에서는 세계적 빈곤과 고통의 문제를 놓고 논의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일부 전문가들은 수많은 국가를 괴롭히는 기근과 보건 문제가 출산 통제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지목합니다. 현대적으로 매우 시사성 있는 주제지만, 사실 생명의 탄생에 대한 고민은 인류 역사에서 아주 오래된 화두였습니다.
고대 철학자들의 상반된 입장
아리스토텔레스는 저서 『정치학』에서 모든 부부가 자녀 수의 상한선을 설정해야 하며, 필요하다면 여성이 낙태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반면 '의술의 아버지'로 불리는 히포크라테스는 낙태가 여성의 건강에 미치는 위험 때문에 같은 관행을 반대했습니다. 도덕적 관점에서는 대(大) 플리니우스가 낙태가 남성을 열등하게 만드는 행위라고 믿었습니다.
남편의 결정권과 낙태
에페소스의 소라노스는 임신이 산모의 생명을 위협하는 경우 낙태를 허용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다만 이러한 선택은 언제나 남편의 결정권과 연결되어 있었는데, 남편들은 재산과 부를 물려받아 관리할 후계자 확보에 더 큰 관심을 두었기 때문입니다. 어느 정도 남성들이 낙태를 비난했던 배경에는 정치적·경제적 이해관계가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태아는 언제부터 인간인가
그 당시에도 낙태가 살아 있는 존재의 소멸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별도의 논쟁이 병행되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에 기반하여 철학자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태아가 자궁 안에서 처음 발길질을 한 뒤 40일 또는 80일이 지나야 비로소 인간으로 인정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따라서 그 기한 이전에 이루어진 낙태는 살인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덜 중요한 범죄로 간주되었습니다.
국가주의 시대, 낙태 금지의 명분
19세기에서 20세기 사이, 낙태는 국가주의적 대계에 대한 실질적인 공격으로 여겨졌습니다. '자연의 선물'로 규정된 여성은 온전히 모성에 헌신해야 했습니다. 그녀가 낳는 각각의 자녀는 노동하고 싸우며 국가의 승리에 기여하는 중요한 사명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결국 낙태는 국가 발전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되었습니다.
기이한 피임법들의 역사
국가와 교회 인사들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낙태는 다양한 사회에서 늘 뚜렷한 존재감을 유지해 왔습니다. 그래서일까요, 기이할 정도로 독특한 피임 방법들이 권장되곤 했습니다. 2세기의 소라노스는 여성이 복부를 조이고 숨을 참으면 정액이 자궁 깊숙이 닿지 못한다고 조언했습니다.
로마인들 사이에서는 물, 소금, 식초를 섞은 용액을 마시는 방법이 유행하기도 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허브, 크림, 질용 오일을 활용한 처방과 자궁 내 삽입물인 페서리(pessary) 등이 무궁무진한 피임 약전의 일부를 이루었습니다. 반면 여러 정부는 도덕적·종교적 편견을 명분으로 낙태를 형사화했으며, 많은 경우 국가는 낙태 퇴치를 시민의 생명을 보호하는 정치적 기능의 일환으로 규정했습니다.
1960년대, 새로운 전환점
1960년대에는 경구피임약의 발명과 페미니즘 운동의 부상이 이 주제에 새로운 국면을 열어 주었습니다. 이후 종교 및 정부 당국자들은 낙태가 여성에게 초래할 위험을 강조하는 데 무게를 두기 시작했습니다. 그럼에도 이 문제는 결론에 도달하기까지 아직 멀었습니다. 여성의 생명과 자율성에 대한 인정은 앞으로도 쉽게 합의에 이르기 어려운 과제로 남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