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이야기

프랑스 레지스탕스의 진짜 영웅들, 놀랍게도 모두 '비(非)프랑스인'이었다!

정찰 활동부터 포로 구출, 게릴라 부대 조직과 전투 지휘까지. 프랑스 레지스탕스를 이끈 다섯 명의 여성 영웅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공통점은, 정작 프랑스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에 점령된 프랑스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저항 운동에 몸을 던졌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용맹하고 헌신적인 인물들은 의외로 외국 출신 여성들이었는데요. 오늘은 프랑스 해방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다섯 명의 여성 영웅들을 소개합니다.

1. 상냥한 갈색 머리 소녀 '데데'

앙드레 드 종(Andrée de Jongh)은 1916년 벨기에에서 태어났습니다. 주변에서는 이 상냥하고 예쁜 갈색 머리 소녀를 '데데(Dédée)'라고 불렀습니다. 1940년 벨기에가 독일에 점령되자, 그녀는 친구들과 함께 연합군 병사들을 숨겨주는 비밀 네트워크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포로수용소에서 탈출한 연합군 포로와 격추된 파일럿들은 지하 조직원들에게 인계되어 브뤼셀 주변의 안전가옥에 숨겨졌습니다. 이들은 민간인 옷과 가짜 신분증을 제공받은 뒤, 프랑스와 스페인을 거쳐 영국령 지브롤터까지 이송되었습니다.

1941년 8월, 25세의 드 종은 영국군 병사 한 명과 함께 스페인 빌바오의 영국 영사관에 도착해 탈출 작전 지원을 요청했습니다. 이렇게 하여 적진 뒤편에서 병사들을 구출하는 임무를 맡던 영국 군사정보국 제9과가 그녀의 활동을 공식적으로 지원하게 되었습니다.

젊은 벨기에 여성이 만든 이 네트워크는 '혜성 라인(Réseau Comète)'이라 불리며 놀라운 효율성을 보여주었습니다. 1944년 벨기에 해방까지 그녀는 무려 400명의 연합군 병사를 스페인으로 성공적으로 이송했고, 그중 상당수는 직접 프랑스와 피레네 산맥을 안내했습니다. 그러나 1944년 초, 35번째 원정 도중 데데는 독일군에게 체포되고 말았습니다.

프랑스 레지스탕스의 진짜 영웅들, 놀랍게도 모두  비(非)프랑스인 이었다!

앙드레 드 종, 1946년 촬영

그녀는 게슈타포의 심문을 무려 20번이나 받았지만 끝내 입을 열지 않았고, 라벤스브뤽 강제수용소로 끌려갔으나 해방까지 살아남았습니다. 전후에는 아프리카로 건너가 28년 동안 한센병 환자들을 돌보는 간호사로 일했으며, 2007년 10월 13일 91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크리스틴 해나의 베스트셀러 소설 『나이팅게일』의 주인공 모델이 바로 그녀입니다.

2. 파리에서 자란 잉글랜드 여성

펄 위더링턴(Pearl Witherington)은 파리에 거주하던 잉글랜드 가정에서 태어나 이 도시에서 성장했고, 이후 영국 대사관에서 근무하게 됩니다. 덕분에 그녀는 프랑스어를 완벽하게 구사해 현지인과 다름없이 보였습니다. 1940년 독일이 프랑스를 격파하자 펄은 영국 본토로 피신했습니다.

그녀는 항공부에서 문서 업무를 맡았지만, 서류만 다루는 일에는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자신의 첫 번째 고향인 프랑스를 위해 싸우는 것이었습니다. 1943년 6월, 펄은 특수작전집행부(SOE)에 자원입대했고, 7주간의 훈련 후 프랑스 상공에 낙하산으로 투하되었습니다. 그녀는 코드명 '스테이셔너(Stationer)' 네트워크에 배속되어 8개월 넘게 연락책으로 활동했습니다.

네트워크 책임자가 독일군에게 체포되자 펄이 지휘권을 넘겨받았습니다. 그녀는 조직을 재건하고 개편하여 무장 인원 1,500명을 확보했고, 이들은 마키(maquis)라 불리는 게릴라 부대로서 게릴라전을 펼쳤습니다. 1944년 6월 6일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앞두고 SOE 본부가 프랑스 내 요원들을 가동시켰을 때, 펄의 부대도 전투에 참여했습니다.

그녀 부대의 전과가 워낙 컸던 탓에 독일군은 펄의 목에 100만 프랑의 현상금을 걸었고, 대토벌 작전으로 부대 소멸을 시도하기도 했습니다. 펄의 마키 부대는 수송 부대를 기습하고 소규모 부대와 순찰대를 공격했으며, 남프랑스와 노르망디를 잇는 철도를 800회 이상 파괴했습니다.

프랑스 레지스탕스의 진짜 영웅들, 놀랍게도 모두  비(非)프랑스인 이었다!

독일군이 100만 프랑의 현상금을 걸 정도로 활약한 펄 위더링턴

1944년 9월 펄은 영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이런 전시 경력이라면 당연히 국민적 영웅으로 추앙받아야 했지만, 현실은 달랐습니다. 그녀는 십자훈장(Military Cross) 후보로 추천되었지만, 여성이라는 이유로 '수여 자격이 없다'는 판정을 받았습니다. 대신 문민 훈장인 대영제국 훈장(OBE)을 제안받았으나, 펄은 이를 거절했습니다. 그녀는 2008년 2월 프랑스에서 93세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3. 반항아 소녀에서 저항의 아이콘으로

낸시 웨이크(Nancy Wake)는 1912년 뉴질랜드 웰링턴에서 태어났습니다. 16살에 집을 뛰쳐나와 간호사로 일했고, 이모에게 빌린 돈으로 뉴욕을 거쳐 런던에 정착해 언론계에 도전했습니다. 그녀는 성공적으로 허스트 신문 유럽 특파원이 되었습니다.

'흰 쥐'

1939년 그녀는 프랑스 실업가 앙리 에드몽 피오카(Henri Edmond Fiocca)와 결혼해 마르세유에 정착했습니다. 1940년 프랑스가 패배하자 웨이크는 레지스탕스에 합류해 연락책으로 활동했고, 이후 연합군 병사 탈출을 조직하던 영국 장교 이언 개로(Ian Garrow)의 네트워크와 협력했습니다.

지하 활동에서 웨이크는 놀라운 기지와 능력을 발휘했습니다. 위험과 검거를 번번이 피하는 그녀의 솜씨에 감탄한 독일군은 그녀에게 '흰 쥐(Weisse Maus)'라는 별명을 붙였습니다. 1943년 그녀는 게슈타포가 프랑스에서 가장 수배하는 인물이 되었고, 목에 걸린 현상금은 무려 500만 프랑에 달했습니다.

같은 해 네트워크 내부의 배신으로 독일군의 대대적인 검거가 시작되자, 웨이크는 영국으로 탈출했습니다. 그녀는 SOE 훈련을 마친 뒤 1944년 4월 29~30일 밤, 프랑스 중부 오베르뉴 지역에 낙하산으로 투하되었습니다. 앙리 타르디바(Henri Tardivat) 대위의 게릴라 부대 연락관이 된 그녀의 활약 덕분에 부대 규모는 7,500명까지 성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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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을 위해 밀정 노릇을 한 소녀 처형을 부드러운 성격의 동료들에게 강행한 낸시 웨이크, 1945년경

그녀는 몽뤼송의 게슈타포 지부 습격 작전을 직접 지휘하기도 했습니다. 자신의 부하들이 독일군 스파이 소녀를 감싸며 총살을 망설이자, 그녀는 그들에게 처형을 강제했다고 전해집니다. 또 한번은 작전 중 맨손으로 독일 경비병을 제압해 게릴라들의 찬사를 받았습니다. 전후 웨이크는 영국 정보기관에서 근무했으며, 호주 의회 선거에 두 차례 출마하기도 했습니다. 그녀는 2011년 8월 98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4. 복수자

비올레트 자보(Violette Szabo)는 영국과 프랑스의 혼혈로, 1921년 파리에서 비올레트 부셸(Violette Bushell)이라는 이름으로 태어났습니다. 프랑스와 영국 양국에서 성장한 그녀는 두 언어를 완벽하게 구사했습니다. 1940년 런던에서 그녀는 헝가리계 프랑스 외인부 장교 에티엔 자보(Étienne Szabo)를 만나 결혼했습니다. 그러나 에티엔은 자유 프랑스군 소속으로 엘 알라메인 전투에서 전사했고, 남편의 죽음은 비올레트가 SOE에 입대해 독일군과 싸우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944년 6월 두 번째 임무에서 그녀는 리모주 인근에 투하되어 프랑스 게릴라 부대를 지원하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6월 10일, 비올레트는 현지 지하조직 지휘관을 만나기 위해 차량으로 이동하다 뜻밖에 독일군 검문소에 마주쳤고, 스텐 기관단총으로 교전을 벌이다 포로로 잡혔습니다.

그녀는 파리로 압송되어 혹독한 고문과 심문을 받았고, 1944년 8월 8일 라벤스브뤽 강제수용소로 이송되었습니다. 1945년 2월 5일, 그녀는 그곳에서 총살당했습니다. 나이는 겨우 23세였습니다.

5. 최고의 스파이는 폴란드 여성

프랑스에서 활동한 SOE 요원 중에는 폴란드 출신의 전설적인 여성 스파이, 크리스티나 스카르베크(Krystyna Skarbek)도 있었습니다. 지주의 딸로 태어난 그녀는 행복하고 풍요로운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승마와 등산을 즐겼고 미스 폴로니아 선발대회에도 출전했습니다. 전쟁이 발발하자 그녀는 프랑스를 거쳐 영국으로 건너갔고, 영국 정보기관에 지원한 뒤 훈련을 마치고 헝가리로 파견되어 첩보 활동을 수행했습니다. 또한 현지 수용소에 억류된 폴란드인들의 탈출도 조직했습니다.

1944년 7월 6일, 크리스티나는 프랑스 남동부에 낙하산으로 투하되어 SOE 요원 프란시스 카마르츠(Francis Cammaerts)가 이끄는 네트워크에 합류했습니다. 그녀는 프랑스 마키 부대와 이탈리아 게릴라 부대 간의 접촉을 성사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8월 중순 독일군이 우연히 저항운동의 핵심 인물 세 명(카마르츠 포함)을 체포하자, 스카르베크는 게슈타포 장교 막스 바엠(Max Waem)에게 직접 연락했습니다.

프랑스 레지스탕스의 진짜 영웅들, 놀랍게도 모두  비(非)프랑스인 이었다!

런던 켄살 그린 세인트 메리 가톨릭 묘지에 복원된 크리스티나 스카르베크의 묘

그녀는 자신을 버나드 몽고메리 장군의 조카라고 소개하며, 포로들에게 해가 가해지면 그 결과를 책임지겠다고 위협했습니다. 동시에 석방 대가로 200만 프랑을 제안하며 회유도 병행했습니다. 위협과 설득을 오가던 그녀의 압박에 결국 게슈타포 장교는 포로들을 석방했고, 물론 약속된 돈을 받지 못했습니다.

스카르베크는 1945년 4월 카이로에서 단돈 100파운드의 퇴직금만 받고 현역에서 물러났습니다. 이후 그녀는 가사도우미, 전화 교환원, 판매원, 여객선 승무원 등으로 생계를 이어갔습니다. 그러나 1952년, 그녀는 프로포즈를 거절했던 승무원에게 흉기에 찔려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