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이야기

존 뎀야뉴크의 삶: 소비보르 수용소 경비병에서 전범 재판까지

우크라이나 출신의 이반(존) 뎀야뉴크는 소비보르 절멸수용소에서 유대인 28,000명 살해에 가담한 혐의로 징역 5년형을 선고받았습니다. 홀로코스트 및 집단학살 연구 교수인 요하네스 하우윙크 텐 카테는 뎀야뉴크에 대한 재판에 연구자로 참여했으며, 이 수용소 처형 담당자의 삶에 대해 광범위한 역사 조사를 진행했습니다.

존 뎀야뉴크는 1920년 4월 3일, 현재의 우크라이나이지만 당시에는 소련 영토였던 작은 마을 두보비 마하린치에서 이반 미하일로비치 뎀야뉴크라는 이름으로 태어났습니다.

스무 살을 막 넘겼을 무렵, 그는 소련 당국에 의해 붉은 군대에 징집되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고 군대는 모든 병력을 절실히 필요로 했습니다. 병역 거부자들은 자비 없이 총살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뎀야뉴크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고 가족을 남겨둔 채 전선으로 나갔습니다. 크림 반도에서 벌어진 전투 중 나치에게 포로로 잡혀 리브네 근처의 포로수용소에 수감되었습니다.

나치 포로수용소의 환경은 매우 열악했습니다. 붉은 군대 병사라면 그곳에 갇히는 것이 최악이었습니다. 나치는 공산주의자를 숙적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굶겨 죽이는 것은 그들을 제거하는 흔한 방법이었고, 나치의 눈에 소련군 병사는 총알 한 발 아까운 존재였습니다. 1941~42년의 혹독한 겨울 동안 수십만 명의 포로가 이 끔찍한 방식으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리브네 수용소에서는 식인 사례까지 알려져 있습니다.

트라브니키

이런 조건 속에서도 살아남은 포로들은 극도로 강한 사람들이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나치는 바로 이런 부류의 사람들을 강제수용소 감시에 활용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히틀러의 '정예병'인 SS 장교들이 수용소를 찾아 단련된 남성들을 모집하는 일이 자주 벌어졌습니다.

그렇게 뎀야뉴크도 선발되었습니다. 정확히 어떤 과정을 거쳐 왜 선택되었는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그는 SS 장교들에게 자신도 그들만큼 공산주의를 증오한다고 확신시켰을지도 모릅니다. 분명한 것은 수용소 경비병으로 지원하는 것이 굶주림에서 벗어날 수 있는 몇 안 되는 방법 중 하나였다는 사실입니다. 당시 뎀야뉴크는 새 직업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유대인 대량 학살 계획은 철저히 비밀에 부쳐져야 했기 때문입니다.

뎀야뉴크는 히르스빌리게(Hilfswillige, Hiwi) 신분으로 트라브니키 훈련소에 보내졌습니다. 당시 그는 22세로 청년 부대에 속해 있었습니다. 훈련소 옆에는 유대인 수용소가 있어 뎀야뉴크와 동료들이 미리 '연습'할 수 있었습니다. 트라브니키는 추방된 유대인들의 식량과 짐을 보관하는 곳이기도 했기에, 뎀야뉴크가 처한 환경은 포로수용소보다 훨씬 나았습니다.

트라브니키는 나치 스스로 하기 싫어하는 각종 더러운 일을 처리할 인력을 비축하는 일종의 인력 창고 역할을 했습니다. 수용소의 남성들은 가장 끔찍한 임무에 동원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로마지 마을에서 유대인 1,700명이 집단 학살된 사건이 있습니다. 마을에서 유대인들은 먼저 현지 경찰에 의해 한곳에 몰려 들어갔고, 트라브니키에서 온 50명이 도착하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들은 총기를 받고 유대인들을 한 명씩 쏴야 했습니다. 아마도 보드카 한 병도 함께 지급되었겠지요. 하우윙크 텐 카테가 조사에서 인용한 목격자들에 따르면, 트라브니키 출신 히위들은 지하수와 피가 뒤섞인 웅덩이에 발목까지 잠긴 채 있었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하나둘씩 취해 쓰러졌습니다.

수용소 경비병으로

'기동 부대'로서 뎀야뉴크는 1943년 1월 폴란드의 마이다네크 절멸수용소에 배치되었습니다. 하우윙크 텐 카테에 따르면 그가 이곳에서 경비병으로 일했다는 것은 확인되지만, 정확히 무슨 일을 했는지는 완전히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뎀야뉴크가 마이다네크에 있을 때 이미 가스실이 가동 중이었으므로, 그것을 알지 못했을 가능성은 낮습니다. 뎀야뉴크는 마이다네크에 오래 머물지 않았습니다. 1943년 3월 27일, 악명 높은 소비보르 절멸수용소라는 새 임무를 위해 차출되었습니다.

뎀야뉴크는 현재 소비보르 시절에 대해 재판받고 있습니다. 4월 3일, 네덜란드에서 온 유대인 대규모 수송열차가 소비보르에 도착했습니다. 뎀야뉴크는 이 수송의 '처리'를 도왔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와 같은 경비병들은 짐을 내리고, 피해자들의 옷을 강제로 벗기고, 채찍과 총검으로 가스실까지 몰아넣는 일을 했습니다. 하우윙크 텐 카테에 따르면 뎀야뉴크의 정확한 몫이 무엇이었는지는 완전히 명확하지 않지만, 그가 현장에 있었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뎀야뉴크는 소비보르에서 승진한 적이 없으며 지휘 직책에 있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명령에 따르는 만능 잡역대였습니다. 소비보르 생존자들에 따르면 트라브니키 출신 남성들의 평판은 나빴습니다. 그들은 무자비함을 배웠고 독일인 스승들보다 더 잔혹하고 악질적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1943년 10월 뎀야뉴크는 플로센뷔르크 강제수용소로 전출되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수용소 기록에 자주 등장하며, 이곳에서 1944년 초 무장친위대(Waffen-SS) '토텐코프 플로센뷔르크' 사단의 현역 멤버로 승진했습니다. 그 이유는 아마도 동쪽에서 철수한 수용소들의 수용자가 대거 유입되면서 플로센뷔르크의 인력이 점점 부족해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SS 신입 멤버들은 오른팔에 SS 문양과 번호를 문신으로 새겼습니다. 그 부위에 아직 남아 있는 흉터가 그 흔적일 수 있습니다. 연합군이 다가오면서 독일 수용소 시스템이 혼란에 빠진 가운데, 뎀야뉴크는 1944년 12월 플로센뷔르크에서 사라졌습니다.

뎀야뉴크는 이후 반공주의 러시아인과 우크라이나인으로 구성된 '러시아 해방군'에 합류하여 한동안 붉은 군대와 싸웠습니다. 결국 오스트리아 비숍스호펜 근처에서 미군에게 포로로 잡혔으나, 곧 석방되어 미군에서 트럭 운전사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적과의 협력 혐의로 러시아 측에 쫓기던 뎀야뉴크는 가능한 한 빨리 유럽을 떠나 미국으로 이민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국제 난민 지위를 부여받아야 했습니다. 그는 1948년 3월 국제난민기구(International Refugee Organization)에 신고하면서 1937년 4월부터 1943년 1월까지 폴란드 첼름의 '소비보르'에서 운전사로 일했다고 진술했습니다. 당시 그 폴란드 마을 근처에 절멸수용소가 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이 꾀는 통했습니다. 뎀야뉴크는 미국 비자를 받았고, 1952년 2월 9일 뉴욕에 도착하여 곧 포드에서 자동차 정비공으로 일자리를 구했습니다.

이스라엘 재판

1970년대 후반에야 미국 당국은 뎀야뉴크의 진술과 소비보르 수용소 사이의 연관성을 서서히 파악하기 시작했습니다. 1981년 6월 25일, 판사는 뎀야뉴크가 전쟁 중의 행적에 대해 거짓말을 했다는 이유로 미국 시민권을 박탈해야 한다고 판결했습니다. 상황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이스라엘의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은 처음에 그를 또 다른 절멸수용소인 폴란드의 트레블린카 경비병으로 알아보았고, 뎀야뉴크는 재판을 받기 위해 이스라엘로 인도되었습니다.

모든 증인이 그를 '공포의 이반(Ivan the Terrible)'으로 지목했습니다. 트레블린카에서 가장 잔혹하고 악명 높은 경비병으로, 가스실을 가동하는 디젤 엔진을 조작하던 인물이었습니다. 뎀야뉴크는 교수형에 처하고 남은 시간을 독방에서 보내라는 판결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1993년에야 이스라엘 대법원은 40년이 지난 증언은 신뢰할 수 없다고 판결했고, 뎀야뉴크는 무죄가 선고되어 미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한편 미국은 뎀야뉴크가 불법적인 방법으로 시민권을 취득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가 소비보르에서 트럭 운전사가 아니라 수용소 경비병으로 일했다는 강력한 정황도 있었습니다. 2001년 뎀야뉴크는 다시 재판에 회부되었지만, 이번에도 유죄 판결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2008년 여름, 이번에는 독일에서 새로운 인도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독일의 나치 전범 추적자들은 뎀야뉴크가 소비보르에서 최소 28,000명의 유대인 사망에 일부 책임이 있다는 방대한 증거를 확보했다고 밝혔습니다.

뎀야뉴크는 당연히 인도에 반대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무죄이며 건강상의 이유로 송환과 재판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도망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체포되어 뮌헨행 비행기에 실렸고, 최근 그곳에서 징역 5년형을 선고받았습니다.

뎀야뉴크는 현재 91세입니다. 뮌헨 재판은 제2차 세계대전 중 수십만 명의 대량 학살에 책임이 있는 자들을 유죄로 만들 수 있는 마지막 통로 중 하나가 될 것입니다. 관련자 대부분은 이미 세상을 떠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