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수용소를 다룬 글이나 책을 읽으면 독일이 1940년 중반에 이곳에 수용소를 설립했다고 나옵니다. 물론 사실이지만, 이야기의 절반일 뿐입니다. 사실 이 수용소의 기원은 그로부터 거의 25년 전, 즉 제1차 세계대전 중인 191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는 갈리치아 주민들의 대규모 이주 시기였습니다. 소폴란드(마워폴스카)와 포드카르파체 지방의 가난한 사람들은 더 나은 삶을 찾아 미국과 서유럽으로 떠났지만, 많은 이들이 그런 긴 여정을 감당할 형편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대신 인접한 프로이센으로 계절노동을 떠났고, 그 길목에서 갈리치아 변경의 마지막 마을, 바로 오시비엥침(Oświęcim)에 머물게 됩니다.
그러나 프로이센에 모두에게 일자리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결국 수천 명의 실직자들이 오시비엥침에 발을 붙인 채 하루벌이라도 일자리를 기다려야 했습니다. 문제는 점점 커져갔고,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많은 이주민들이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지며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전간기 오시비엥침의 병영. 훗날 독일이 이곳에 강제수용소를 세우게 됩니다.
실업자들로 도시가 넘쳐나는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당국은 도심에서 약 3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특별 부지를 마련했습니다. 1916년 이 부지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정부에 매각되었고, 이듬해인 1917년 정부는 이곳에 이주민과 계절노동자를 위한 수용 시설을 건설했습니다.
오스트리아 출신 역사가 지빌레 슈타인바허(Sybille Steinbacher)는 저서 『아우슈비츠: 수용소와 도시』에서 이렇게 기술합니다. "계절노동자 수용소는 경사 지붕의 벽돌 건물 22동과 목조 막사 90동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일자리를 찾는 12,000명을 수용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19쪽).
1940년 6월 14일 타르누프 철도역에서 화물차에 실려가는 수용자들. 이것이 콘첸트라치온스라거 아우슈비츠(Konzentrationslager Auschwitz)로 향한 첫 대규모 수송이었다(출처: 퍼블릭 도메인).
수용소는 문을 열었지만 2년도 채 운영되지 못했습니다. 그 사이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났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유럽 지도에서 사라졌습니다. 재건된 폴란드 정부는 거대한 수용소를 계속 유지할 생각이 없었지만, 그 부지는 자동으로 폴란드의 국유 재산이 되었습니다. 이후 이곳은 다양한 용도로 활용되었습니다.
먼저 폴란드-체코 국경의 분쟁 지역인 자올지에(Zaolzie)에서 온 수천 명의 피난민들이 이곳에 정착했습니다. 슈타인바허에 따르면 이들은 학교, 예배당, 극장, 스포츠 클럽, 사격 동호회까지 갖춘 작은 정착촌을 이루었다고 합니다(20쪽). 수용소의 일부는 국영 담배 전매공사에 넘겨졌고, 가장 넓은 부분은 폴란드 군대가 접수하여 실업자 수용소였던 이곳을 군사 캠프로 탈바꿈시켰습니다.
구 수용소 기능의 유일한 흔적은 고용 알선소였습니다. 이곳은 1930년대까지 운영되었습니다.
막사 단지는 전쟁 발발 때까지 그대로 남아 있었고, 1940년 SS 남동관구를 총괄하던 에리히 폰 데 바흐-잘레프스키(Erich von dem Bach-Zelewski)의 눈에 띄었습니다. 그는 이곳에 계획 중인 강제수용소를 설립할 것을 제안했습니다.
SS 지도부는 낡아가는 막사의 열악한 상태와 홍수 위험 지역에 있다는 점 때문에 만족스럽지 않았지만, 특별위원회는 입지의 장점이 단점보다 크다고 판단했습니다. 이곳은 기반 시설이 잘 갖춰져 있었고, 이미 울타리가 쳐져 있었으며, 철도 요충지에 위치해 외부와 차단하기도 쉬웠기 때문입니다(30쪽).
최종 결정은 1940년 4월 내려졌습니다. 아직 그곳에 살고 있던 자올지 출신 이주민 1,200명은 즉시 쫓겨났고, 독일은 악명 높은 콘첸트라치온스라거 아우슈비츠 건설에 착수했습니다.
참고 자료
이 글은 다음 자료를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
- Sybille Steinbacher, 『Auschwitz. Camp and town』, Wydawnictwo Naukowe PWN,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