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이야기

비소를 든 마담 – 브랭빌리에 후작 부인의 충격적인 독살 사건

파리를 뒤흔든 한 여인의 고백

1676년 여름, 아버지와 두 오빠, 그리고 연인까지 독살한 혐의로 고문당하던 마리-마들렌 드브레이, 이른바 브랭빌리에 후작 부인의 진술은 파리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결과를 낳았다. 그녀의 고백을 계기로 프랑스 귀족 사회 전체를 뒤흔든 독살 스캔들이 터졌고, 특히 귀족 여성들에 대한 인식은 완전히 바뀌고 말았다.

화려한 결혼, 불행한 부부 생활

1630년 7월 22일, 마리-마들렌 드브레이는 루이 14세 궁정의 유력 인사였던 국왕 참사관 앙투안 드뢰 드브레이의 딸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남다른 미모로 주변의 시선을 사로잡았지만, 아름다운 얼굴 뒤에는 화가 날 때마다 드러나는 폭발적인 성격이 숨겨져 있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21세에 부유한 고블랭 가문의 앙투안 고블랭과 결혼하며 브랭빌리에 후작 부인이 되었다. 결혼 생활은 짧은 기간에 세 자녀를 낳을 만큼 이어졌지만 결코 행복하지 않았다. 남편은 수많은 정부를 두고 젊은 아내보다 다른 여인들 곁에서 시간을 보내기를 더 좋아했다.

남편 쪽 인연으로 마리는 잘생긴 외모에 열정적인 성격을 지닌 고댕 드 생트크루아 대위를 만나 격정적인 불륜에 빠진다. 흥미롭게도 이 관계는 남편의 묵인 아래 이루어졌는데, 아내에게 정부가 있는 동안 자신도 다른 여인들을 마음껏 즐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모두가 이 타협에 만족하는 듯했지만, 셰익스피어의 말처럼 격렬한 기쁨에는 격렬한 끝이 따르는 법이다.

마리는 불륜을 숨기지 않았고, 이웃들의 호기심과 험담은 갈수록 커져갔다. 17세기 프랑스에서 여성은 연인을 가질 수 있었지만, 오직 그 관계가 침실 벽 안에 철저히 숨겨져 있을 때만 가능한 일이었다. 딸의 뜨거운 로맨스 소식을 접한 아버지 앙투안 드브레이는 못마땅하게 여겼고, 자신의 인맥을 동원해 왕실 명령으로 생트크루아를 감옥에 처넣어 버렸다.

비소를 든 마담

감옥에서 보낸 시간은 생트크루아의 마리에 대한 열망을 식히지 못했지만, 그의 인생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 옥중에서 그는 수많은 새로운 인연을 맺었는데, 그중에는 이탈리아 출신 독살자도 있었다. 그는 생트크루아에게 독물의 기술에 관한 모든 것을 가르쳤고, 출옥 후 생트크루아는 그 지식을 기꺼이 연인인 마리에게 나누어 주었다.

생트크루아의 집 지하에는 두 사람이 함께 만든 연금술 실험실이 자리 잡았다. 그들은 비소를 포함한 각종 물질로 실험을 거듭했다. 연인을 감옥에 처넣은 아버지에게 복수하고 싶었던 후작 부인은 아버지를 응징하기로 마음먹었다. 단, 그러기 위해서는 철저한 준비가 필요했고, 그녀는 가장 호기심을 자극하지 않는 장소를 연습의 무대로 택했다.

당시 많은 귀족들이 그렇듯 브랭빌리에 후작 부인도 자선 활동에 적극적이었다. 그녀는 빈민 수용소와 병원을 정기적으로 방문해 가난한 이들과 환자들에게 친절한 말과 먹을 것을 나누어 주었다. 그러나 그 이면에서 그녀는 자신이 만든 독약을 이들에게 몰래 시험하고 있었다. 여러 용량의 독을 받은 희생자들은 구토와 극심한 두통, 의식 상실에 시달리다 끝내 목숨을 잃었다.

비소를 든 마담 – 브랭빌리에 후작 부인의 충격적인 독살 사건

완벽한 독을 만들었다고 확신한 그녀는 아버지를 찾아가 음식에 치명적인 물질을 넣었다. 아버지는 곧 원인을 알 수 없는 급속히 악화되는 병세를 보이다 끝내 세상을 떠났다.

유언장에 따라 그녀는 아버지 재산의 일부를 상속받았고, 나머지는 두 오빠에게 돌아갔다. 이것도 그녀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마리는 사치스러운 생활을 이어가는 데다 연인 생트크루아의 빚까지 갚아야 했는데, 이는 사랑보다는 그가 자신의 살인 비밀을 폭로할까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안전을 위해 그녀는 오빠들까지 독살하기로 결심했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남편을 없애고 그의 재산을 차지할 계획까지 세웠다.

그러나 남편 고블랭은 슬슬 눈치채기 시작했고, 아내의 손이 닿지 않도록 신뢰하는 두 하인에게 식사 준비를 맡겼다. 이것이 현명한 판단이었음은 곧 드러났다.

독살 스캔들의 발단

1672년 7월 30일, 고댕 드 생트크루아 대위가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다. 말년의 그는 파산 직전에 명성마저 더럽힌 상태였기에, 처음에는 자살로 추정되었다. 그러나 그가 연금술 실험실로 사용하던 지하실을 조사하면서 판단이 달라졌다.

그곳에서 붉은 상자와 편지 한 통이 발견되었다. 편지에는 자신이 죽으면 상자를 브랭빌리에 후작 부인에게 돌려달라는 부탁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이 유언은 지켜지지 않았고, 상자는 경찰서로 향했다. 연인의 죽음 소식을 접한 마리는 즉시 경찰서를 찾아 상자를 요구했다. 그녀는 애원하고, 협박하고, 심지어 뇌물까지 제안했지만 모두 허사였다. 상자는 열렸고 내용물은 꼼꼼히 분석되었다.

상자 안에는 수수께끼의 독약이 담긴 병들과 브랭빌리에 부인이 생트크루아에게 쓴 연애편지가 들어 있었다. 이것들은 그녀의 범행을 폭로하는 결정적 증거였다. 병 속의 물질은 가축에게 시험되었고, 그 모두가 죽었다.

체포 영장을 기다리지 않은 마리는 런던으로 도피했고, 이후 네덜란드를 거쳐 리에주의 수도원에 몸을 숨겼다. 그러나 1676년 그곳에서 체포되었다. 처벌을 피하려고 그녀는 유리 조각과 핀을 삼키는 극단적인 시도를 했으나 구조되어, 아버지와 오빠들, 수용소 사람들과 병원 환자들을 살해한 방법을 상세히 적어 놓은 원고와 함께 파리로 압송되었다. 원고에는 남편과 시누이, 연인까지 죽일 계획을 자랑스럽게 적어 두기도 했다.

비소를 든 마담 – 브랭빌리에 후작 부인의 충격적인 독살 사건

심문 과정에서 그녀는 모든 죄를 이미 죽은 생트크루아에게 돌리려 했다. 그러나 고문이 시작되자 태도가 바뀌었다. 그녀는 물고문이라 불리는 혹독한 형벌을 받았다. 팔다리는 바닥에 묶이고 몸은 몸통이 위로 향하게 나무 지지대 위에 얹혔다. 입에는 린넨 천을 물리고 그 사이로 깔때기를 넣어 물을 부어 천이 위장으로 밀려 들어가게 했다. 입 밖으로 천이 조금만 남으면 집행자는 그것을 잡아당겨 위장 깊숙이 끌어냈고, 이 과정은 상상하기 어려운 고통을 동반했다. 마리는 오래 버티지 못하고 모든 범행을 자백했다.

1676년 7월 16일, 그녀는 참회복을 입고 노트르담 대성당 앞을 지나며 모든 죄를 공개적으로 고백했고, 이후 그레브 광장에서 참수형에 처해졌다. 시신은 불태워졌다.

그러나 그녀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고문 중에 마리는 또 하나의 중요한 진술을 남겼다. 자신은 붙잡혔지만, 파리의 독살자는 자신만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녀의 진술은 상류층 인사들이 대거 연루된 유명한 독살 사건의 발단이 되었다. 그 연루자 중에는 루이 14세의 공식 정부였던 몽트스팡 후작 부인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