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란드 제2공화국에도 '루스트라치아' 재판이 있었다?
루스트라치아(전력 조사)는 분명 현대의 산물이다. 하지만 놀랍게도 전간기, 즉 두 차례의 세계대전 사이 시기에도 폴란드 법원은 성격이 유사한 사건들을 심리해야 했다.
형식적으로 보면 전간기 폴란드에는 '루스트라치아'라는 제도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새롭게 수립된 폴란드 제2공화국은 분할 지배 세력들이 남긴 유산을 장단점 모두 그대로 물려받았다. 물론 차르 정권 비밀경찰 오흐라나(Ochrana)의 정체가 드러난 스파이들이 편안한 삶을 살았던 것은 아니지만, 점령자에게 지나치게 밀착 협조했던 인사들을 체계적으로 청산하는 작업이 이뤄지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가끔씩은 오늘날의 용어로 말하면 '루스트라치아'적 실마리가 얽힌 재판 소식이 여론을 들썩이곤 했다.
브로니스와프 리흘린스키(Bronisław Rychliński) 박사의 사건이 바로 그런 경우였다. 오렐 감옥의 전직 의무관인 그는 1927년 8월, 전과자 출신 국회의원 얀 크바핀스키(Jan Kwapiński)가 사회주의 계열 신문 '로보트니크(Robotnik)' 지면에 게재한 글에서 폴란드성을 부인했을 뿐만 아니라 차르 정권과 결탁해 수감자들을 학대했다는 고발을 당했다.

모든 것은 사회주의 계열 의원 얀 크바핀스키의 고발에서 시작되었다.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오늘날 많은 사건들에서 그렇듯, 이런 굴욕적인 행동을 저질렀다는 비난을 받은 칼리시(Kalisz)에서 활동하던 의사는 법정에서 명예를 되찾기로 결심했다. 리흘린스키는 사회주의 계열 의원이자 '로보트니크' 주필 스타니스와프 두보이스(Stanisław Dubois)를 상대로 명예훼손 소송을 제기했다. 여러 차례 연기 끝에 이 사건은 1931년 10월에야 바르샤바 지방법원의 심리 대상에 올랐다.
증인석에 선 리흘린스키는 처음에 자신에 대한 고발이 칼리시 사회주의자 집단이 자신을 병원 원장 자리에서 몰아내려고 꾸민 일련의 음모 중 하나라고 주장했고, 그들의 계략이 결국 성공했다고 지적했다. 또한 그 결과로 "나는 오늘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나 완전히 파탄에 이르렀다"고 강조했다.
1908년부터 맡았던 오렐 감옥 의무관 시절 자신의 태도에 대해서는, '우치 일보(Dziennik Łódzki)'의 보도에 따르면 이렇게 말했다.
"이런 혐의들은 전혀 근거가 없다. 나는 감옥 행정의 처우에 아무런 영향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환경은 가혹했고, 수감자들은 수갑에 채워져 병중에도 풀려나는 경우가 드물었다. 이는 애초에 주지사의 관할권 밖의 문제였고, 전적으로 주지사의 결정에 달려 있었다."

그는 스스로 수감자들과 사적인 접촉을 한 적이 없으며, 누가 폴란드인인지조차 알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얀 크바핀스키는 상당히 다르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폴란드 사회당(PPS) 혁명파 무장조직 활동으로 1907년부터 주로 오렐에서 15년의 중노동형을 살았던 인물이었다.
S. 미레프스키(S. Milewski)가 저서 '전간기의 어두운 사건들(Ciemne Sprawy Międzywojnia)'에서 전하는 바에 따르면, 전직 의원은 한 번 의사에게 다가가 속삭이며 자신이 폴란드인이라고 알렸을 때 "말차트, 가바리트 포 루스키(Małczat', gawarit' po Ruski)", 즉 "닥치고 러시아어로 말해"라는 대답을 들었다고 증언했다. 게다가 크바핀스키는 리흘린스키가 막강한 권세를 누렸으며, 모든 수감자가 그를 보면 모자를 벗어야 했다고 주장했다.
수감자들은 다르게 기억한다
증인으로 불린 다른 전직 수감자들 역시 사회주의 정치인의 주장을 뒷받침했다. 오렐 감옥에 갇히는 불운을 겪었던 이들은 예컨대 그 의사가 다음과 같은 행위에 가담했다고 지목했다.
600명의 수감자에게 가해진 채찍질을 집행하는 것을 도왔다. 그리고 그가 발급한 진단서는 자살하거나 채찍에 맞아 고문 끝에 숨진 수감자들의 죽음을 덮는 데 쓰였다.

크바핀스키를 상대로 한 소송은 폴란드 전역의 신문에 보도되었다. 리비우(Lwów)의 '폴스키에 스워보(Polskie Słowo)'도 1931년 5월 2일자 호에서 이 사건을 다루었다.
'우치 일보'의 보도에 따르면, 얀 크바핀스키의 변호인은 자신의 의뢰인이 리흘린스키 박사의 태도에 관해 진실에서 벗어나지 않았음을 입증하기 위해 소련 관영 신문 '이즈베스티야(Izvestia)'의 보도를 제시했다. 그 신문은 이렇게 썼다고 한다.
"재판 과정에서 리흘린스키 박사는 무례한 행위, 태만, 경시, 그리고 정치범 학대에 대해 유죄를 인정했다."
그는 볼셰비키 기관에서 6년간 근무한 공로를 들어 감형을 호소했다.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
결국 그는 형기를 다 살지 않았는데, 1924년 폴란드에서 체포된 공산주의자와 포로 교환되면서 석방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소련의 재판에는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 게다가 바르샤바 법원은 해당 기사를 증거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언론의 법정 보도는 문서가 아니라는 것이 이유였다. 그럼에도 '우치 일보'가 지적했듯이, 변호측의 논거는 특징적이고 강한 반향을 일으켰다.

'우치 일보' 1931년 10월 21일자 기사 발췌.
이틀간의 재판 끝에 1931년 10월 20일, 법원은 피고 양측 모두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증인들의 증언이 리흘린스키 박사에 대한 혐의가 사실임을 입증하는 증거가 되었기 때문이다.
루스트라치아?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이 모든 사건을 S. 미레프스키의 책에 인용된 바르샤바 '르제초스포리타(Rzeczpospolita)' 통신원이 매우 절묘하게 요약했다.
"리흘린스키 박사는 암울한 과거의 그림자다. 그리고 폴란드에는 그와 같은 사람이 얼마든지 있다. 그들 다수는 상대가 누구인지 모른 채 동포들의 존경까지 받고 있을지도 모른다."

'포즈난 쿠리에르(Kurier Poznański)'의 재판 보도.
이어 기자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해 보이는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어째서 러시아 체제에서 활동하며 자신의 폴란드 혈통을 부끄러워하고, 때로는 동포에게 적대적이기까지 했던 인물들이 존경을 받는가? 그들은 러시아가 패망한 뒤에야 폴란드를 기억했다."
수십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과연 무엇이 달라졌을까? 아마 달라진 것은 우리 증조부들이 차르 시절의 과거와 씨름했다면, 우리는 공산주의 시절의 과거와 씨름한다는 것뿐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