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이야기

브와디스와프 헤르만(Władysław Herman), 정말 실패한 군주였을까?

역사와 역사가들의 자비가 닿지 않는 군주가 있다. 권력자의 앞잡이, 독일 황제의 꼭두각시, 아무런 공헌도 없는 허수아비 군주. 폴란드 역사에서 브와디스와프 헤르만(재위 1079~1102)은 바로 이런 이미지로 남아 있다. 그러나 카지미에시 M. 바란스키(Kazimierz M. Barański) 교수는 이러한 평가가 완전히 잘못되었다고 주장한다.

브와디스와프 헤르만의 통치는 흔히 시작과 끝이라는 두 지점만으로 평가받곤 한다. 그러나 어느 쪽도 특별히 영광스럽지 못했다. 브와디스와프는 형 볼레스와프 2세 시드리(볼레스와프 용맹공)가 귀족들의 음모로 폐위된 뒤 왕좌에 올랐다. 쿠데타에 가담했을 가능성도 있지만, 주도자라기보다는 배후 세력의 도구였을 것이다. 게다가 통치 말기에는 궁정백 시에치흐(Sieciech)에게 국정을 완전히 빼앗겼고, 두 아들과 차례로 심각한 갈등을 빚었다. 임종 전에는 광대한 국토 중 마조프셰(Mazovia) 한 지역만 다스렸으며, 폴란드에 대한 그의 주권은 명목상에 불과했다.

그렇다면 그 사이 이 공작은 과연 무엇을 하고 있었던 걸까? 놀랍게도 할 일이 참 많았다.

1. 반대파 무마와 귀족 포섭

첫째, 브와디스와프 헤르만은 반대파(축출된 형의 옛 지지자들)를 무력화하고 미온적인 귀족층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였다. 볼레스와프가 헝가리 어딘가에서 요절하자(스스로 칼에 찔려 죽었으리라 추정된다), 새 공작은 그의 유해를 직접 모셔다가 티니에츠(Tyniec)에 장엄히 안장했다. 볼레스와프의 미망인과 아들 미에슈코(Mieszko)도 함께 데려와 보살폈다. 이 두 가지 조치로 모든 비판자들의 입을 막았다.

브와디스와프 헤르만(Władysław Herman), 정말 실패한 군주였을까?

브와디스와프 헤르만 — 19세기 화가들의 두 가지 상상.

2. 권위의 확립

둘째, 그는 자신의 권위를 뚜렷이 드러냈다. 형의 발자취를 따라 이웃 나라들을 자극하는 왕관을 좇지는 않았지만, 이제부터 누가 실권자인지 모두에게 분명히 각인시켰다. 바란스키 교수는 저서 『중세 폴란드사』에서 이렇게 설명한다: '즉위식을 볼레스와프의 대관식에 필적하도록 웅장하게 치렀다. 이를 위해 크라쿠프의 11세기 주교 전례서에 기록된 공작 즉위 의식을 활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브와디스와프 헤르만(Władysław Herman), 정말 실패한 군주였을까?

공작 은화. 브와디스와프 헤르만의 경영 능력을 보여주는 실물 증거.

3. 외교적 난국의 수습

셋째, 형이 남긴 외교적 폐허를 정리했다. 볼레스와프는 용맹하고 호전적이었지만 정치적 감각이 확실했던 것은 아니었다(그래서 비참한 최후를 맞았을 것이다). 브와디스와프 헤르만은 반대로 감각이 뛰어났다. 그는 신속히 모든 이웃과 화해했다. 먼저 체코 공작 브라티슬라프(Vratislav)의 딸과 결혼했고, 체코와 동맹을 맺고 실레지아에서 공물을 바침으로써 독일 황제 하인리히 4세의 야욕으로부터 폴란드를 지켜냈다. 1085년 황제는 브라티슬라프에게 왕관을 씌우고 무력으로 폴란드를 정복해 하나의 슬라브 왕국에 예속시키라고 명령했다. 브라티슬라프는 물론 왕관을 기꺼이 받아들였지만, 전쟁을 일으킬 생각은 없었다. 사위이자 충실한 친구를 공격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첫 번째 아내가 죽은 후, 브와디스와프 헤르만은 진정한 외교적 걸작을 선보였다. 하인리히 4세의 누이이자 헝가리 왕 솔로몬의 미망인과 재혼한 것이다. 이로써 폴란드-독일 관계와 폴란드-헝가리 관계 양쪽의 갈등 가능성을 동시에 차단했다. 루스(Rus)와도 항구적인 평화를 체결했다. 단 몇 년 만에 다른 피아스트(Piast) 왕조 군주들이 평생 이루지 못한 것을 해냈다. 나라의 모든 국경에 평화가 찾아온 것이다.

4. 재정 관리의 달인

넷째, 브와디스와프 헤르만은 훌륭한 회계사임을 입증했다. 볼레스와프는 국고에 커다란 구멍을 남겼다. 브와디스와프는 공작 금고를 다시 채웠고, 제대 된 액면가의 화폐를 주조했으며, 백성을 수탈하지 않고도 재정 건전화를 이루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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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교회 조직의 후원

다섯째, 그는 교회 조직(당시 교회는 국가와 불가분한 존재였다)의 후원자였고, 이는 매우 현명한 선택이었다. 화려하지만 실용성이 떨어지는 대성당 건립에만 집중하는 대신, 지방 교회 구조 — 특히 부주교구(archdeaconry) — 의 발전에 자금을 지원했다. 덕분에 폴란드 내 기독교를 공고히 하고, 후계자들이 또 다른 이교도 반란에 시달리지 않도록 기반을 마련했다.

6. 신중한 전쟁 개시

여섯째, 그는 무모한 짓을 하지 않았다. 모든 국경이 안전해진 후에야 전쟁을 시작했다. 그리고 외교적으로 해를 입힐 수도, 효과적인 동맹을 맺을 수도 없는 유일한 적수인 이교도 포메라니아인(Pomeranians)을 향해 진군했다.

성공 스토리였던 첫 10년

따라서 브와디스와프 헤르만 통치의 첫 10년은 분명한 성공 스토리였다. 다만 그 이후 — 건강 악화, 노령, 그리고 오늘날 우리가 소진(burnout)이라 부르는 상태 때문에 — 공작은 점차 상황에 대한 통제력을 잃고 주변 인물들에게 휘둘렸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의 업적을 모두 무효화할 이유는 되지 않는다. 그는 좋은 군주였다. 적어도 그때까지는.

출처

이 글은 흥미로운 일화와 과거의 놀라운 기록을 다루는 짧은 자료로, 단일 출처에 기반하며 3분 안에 읽을 수 있다. 이번 자료의 출처는 다음과 같다.

  • Marek Kazimierz Barański, 『History of Medieval Poland』, Zysk i S-ka,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