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마치에이 갑란코프스키(Maciej Gablankowski)가 체스와프 키슈차크(Czesław Kiszczak)의 측근 그룹에 관한 글을 발표했다. 이 글은 댓글 쇄도를 불러일 만큼 큰 반향을 일으켰고, 많은 독자들은 그 시절 비밀경찰 요원들의 이후 행방에 뜨거운 관심을 보였다. 과연 정의는 실현되었는가? 판단은 독자 여러분의 몫이다.
공산 체제에 대한 충성스러운 봉사의 대가는 종종 외교관 경력이라는 형태로 돌아왔다. 보구스와프 스타후라(Bogusław Stachura)는 1983년 부다페스트 주재 대사로 임명되었으며, 2008년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중장 계급에 올랐다. 그의 논란이 될 만한 '업적'으로는 라돔(Radom) 시위 진압에 가담한 것과 계엄령 준비 작업, 즉 소위 '여름 작전(Operation Summer)'의 총괄 지휘가 꼽힌다.
제3공화국 시대에 그는 스타니스와프 피야스(Stanisław Pyjas) 사망 사건 수사를 방해한 혐의로 기소되기도 했다. 그의 죽음을 다룬 한 기사는 제목부터 "인민 폴란드의 수석 서기가 죽었다"였다. 그러나 이처럼 논란 많은 과거에도 불구하고, 그를 군사 묘지 포반츠키(Powązki)에 안장하려는 계획을 막은 이는 아무도 없었다. 결국 스타후라는 폴란드 최고의 영웅들 곁에서 잠들게 되었다.

키슈차크 본인의 말년에 관해서는 굳이 소개할 필요도 없다. 문제는 그의 부하들이었다. 그들은 어떤 운명을 맞이했을까?
또 다른 중장인 브와디스와프 포조가(Władysław Pożoga)는 더 매력적인 자리를 손에 넣었다. 1989년 10월부터 1991년 5월까지 그는 소피아 주재 대사로 근무했다.
그의 이름은 한동안 헨리크 피에추흐(Henryk Piecuch)의 저서와 연관되어 언론에 오르내리기도 했다. 이 책은 포조가가 KGB가 폴란드 야권 단체들을 침투시키는 과정에 대해 상당한 정보를 알고 있었다고 시사했다. 그러나 포조가 본인은 이러한 의혹과 강경하게 거리를 두었고, 해당 출판물은 자신의 승인을 받은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책임도 없이, 후폭풍도 없이
브와디스와프 치스토니(Władysław Ciastoń)와 제논 플라테크(Zenon Płatek) 두 사람의 행적만으로도 책 한 권 분량의 이야기가 나온다. 단적으로 말하면, 예르지 포피엘루슈코(Jerzy Popiełuszko) 신부 살해 사건에서 '관리급 배후' 혐의를 받았던 이 두 신사는 1994년, 독립된 재판부에 의해 모든 혐의에서 풀려났다.

키슈차크의 측근 중 한 명은 군사 묘지 포반츠키에 안장되었다. 바로 영웅적인 바르샤바 봉기 참가자들의 바로 옆에 (사진: Monikoska, CC BY-SA 3.0).
요제프 호멘토프스키(Józef Chomętowski)는 팀원 중 젊은 편에 속했다. 1965년에야 내무부에 들어왔지만, 사법 분야에서는 눈부신 경력을 쌓았다. 무려 19세에 군 검찰관이 된 것이다. 법률 지식이 남다르게 폭넓어서였으리라고 짐작하기는 어렵다. 호멘토프스키 자신이 이를 사실상 인정한 바 있다.
스탈린주의 체제 하의 불법 구금 관련 재판에서 그는 당시에는 상사의 명령에 맹목적으로 따를 수밖에 없었다고 진술했다. 바르샤바 군 파견 법원은 호멘토프스키에게 혐의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바로 그 법정에서, 스탈린주의 탄압의 희생자이자 언론인인 타데우시 M. 플루잔스키(Tadeusz M. Płużański)는 법원 직원으로부터 "노신사를 괴롭히지 마시오"라는 말을 듣게 된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
헨리크 발친스키(Henryk Walczyński) 대령은 공안(SB) 내에서 KOR(노동자방위위원회)의 가장 강력한 적수였다. 안제이 프리슈케(Andrzej Friszke)는 저서 『연대 혁명』에서 이를 상세히 다룬다. 발친스키는 2013년 85세로 세상을 떠났다. 동료들과 달리, 자유 폴란드에서 그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알려진 것은 많지 않다.
즈지스와프 사레비치(Zdzisław Sarewicz)는 키슈차크 측근 팀 중 유일하게 제3공화국에서도 특수기관에 남은 인물이다. 크시슈토프 코즈워프스키(Krzysztof Kozłowski)가 『티그드니크 포프셰흐니(Tygodnik Powszechny)』와의 인터뷰에서 직접 밝힌 바 있다.
"내가 그를 모스크바로 보냈다. 그는 몇 년간 그곳에 머무르며 해야 할 일을 했다. 그는 폴란드 공화국에 충성했다. 만약 WiP 출신 30세 젊은이, 즉 나와 함께 내무부로 들어온 몇 안 되는 인물 중 하나를 보냈다면,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을 것이다."
"훗날 안토니 마체레비치(Antoni Macierewicz)가 장관이 되어 전직 SB 장군이 아직도 모스크바에 있다고 나를 비난했을 때, 나는 그에게 사레비치가 실제로 무엇을 하는지 직접 확인해 보라고 했다. 마체레비치는 확인하고 나서 나와 의견을 같이했다." (인용 출처: 『그럴 수밖에 없었는가?』, 『티그드니크 포프셰흐니』)

안토니 마체레비치 역시 크시슈토프 코즈워프스키와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사레비치는 모스크바 자리에 꼭 필요한 인물이었다는 것 (사진: Adrian Grycuk, CC BY-SA 3.0 pl).
수많은 의혹, 드문 답변
그러나 가장 흥미로운 행보를 보인 인물은 단연 요제프 사신(Józef Sasin)이다. 바로 '연대(Solidarity)'가 인수하기로 되어 있던 그 사람이다. 1990년 이후 그는 사업계로 넘어갔다. 그리고 살해당한 경찰청장 마렉 파파와(Marek Papała)는 죽음을 맞은 날 그의 아파트에 머물렀던 것으로 확인된다. 그곳에서 파파와는 살해 지시를 내린 것으로 의심받는 에드바르트 마주르(Edward Mazur)와 만났다.
요제프 사신은 이 문제와 관련해 특별 성명을 발표했다. 그는 날카롭게 선을 그었다. "범죄 세계의 활동과 나를 연결 짓는 것은 특히 모욕적이며, 나에게 심각한 해가 된다." (『리흘리크와 사신, 부인하다』, 가제타 비보르차)
확실한 사실은 하나다. 그와 마주르는 마렉 파파와가 생전 마지막으로 마주한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물론, 파파와가 자신의 살인범의 얼굴까지 볼 수 있었다면 말이지만.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본 체제의 붕괴
1989년 이후의 이야기는 단순한 인사 이동의 기록이 아니다. 가해자는 명예로운 자리를 지켰고, 피해자는 법정에서 "노신사를 괴롭히지 마시오"라는 말을 들어야 했다. 키슈차크 팀의 운명은 폴란드가 공산주의의 과거와 어떻게 마주했는지를 보여주는 뼈아픈 거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