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팔마나자르(George Psalmanazar)의 본명은 오늘날까지도 밝혀지지 않았다. 그는 1680년경 프랑스 남부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라틴어를 비롯한 언어에 남다른 재능을 지닌 귀재였고, 세상에 대한 호기심도 남달랐다. 바로 이 고향의 국경 너머에 숨겨진 세계를 보고 싶다는 갈망이 그를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기꾼 중 한 명으로 만들었다.
17세기와 18세기가 교차하던 시절, 여행은 값싸고 안전한 활동이 아니었다. 하지만 조지에게는 계획이 있었다. 영어를 조금 배운 그는 로마로 향하는 아일랜드 순례자로 행세하기 시작했다. 불행히도 아일랜드는 그의 기만이 금세 드러나기에는 충분히 먼 나라가 아니었다. 결국 그는 새로운 정체를 꾸며야 했고, 이번에는 한층 더 이국적인 것을 노리기로 했다.
처음에는 일본 이교도가 되었고, 시간이 지나며 먼 포르모사(오늘날의 타이완) 출신으로 변신했다. 자신이 만들어낸 인물을 믿음직스럽게 만들기 위해 태양과 달을 숭배하고, 카다몬을 양념한 생고기 같은 기괴한 음식을 먹으며, 스스로 고안한 언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준비를 마친 그는 유럽을 떠돌다 네덜란드에 도착했고, 그곳에서 스코틀랜드 연대의 군목 알렉산더 이네스(Alexander Innes)를 만났다.
사진: 퍼블릭 도메인. 조지 팔마나자르의 실제 이름과 성은 오늘날까지도 알려져 있지 않다.
이네스는 그에게 세례를 베풀며 오늘날까지 알려진 이름, 팔마나자르를 지어주었다. 이 이름은 성서 속 아시리아 왕 살만에셀 5세(Salmanassar V)를 기려 붙여진 것이었다. 두 사람은 함께 로테르담을 떠나 런던으로 향했고, 바로 이 도시에서 사기꾼은 진정한 명성을 얻게 된다.
1703년 영국에 도착한 조지는 거의 즉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그는 이곳저곳에서 자신이 유럽 대륙에 발을 디딘 최초의 포르모사인이라고 선언했다. 그는 머나먼 미지의 땅에 대한 사람들의 호기심, 그리고 무엇보다도 영국인들의 가톨릭에 대한 강한 반감 위에 자신의 인기를 쌓아 올렸다.
팔마나자르는 잔혹한 예수회 선교사들이 자신을 고향에서 납치해 프랑스로 끌고 가 가톨릭 신앙을 강요했다는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이 이야기에는 나름의 논리가 있었다. 당시 예수회 선교사들은 먼 땅을 직접 방문해 조지의 주장을 검증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덕분에 많은 사람들은 수사(修士)들의 반박을, 교황의 신앙으로 강제 개종시키려는 그들의 잔혹한 수법을 감추기 위한 거짓말로 받아들였다.
포르모사 이야기
사회적 지위를 확보한 팔마나자르는 이국적인 포르모사에 대한 이야기를 펼치기 시작했고,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매혹적인 이야기들은 영국 대중을 완전히 홀렸다.
그의 삶과 여행에 대한 허구의 이야기는 출판계의 센세이션이 되었고, 식인 풍습, 일부다처제, 영아 살해 등 포르모사의 일상을 그린 수많은 선정적인 디테일과 (더 중요하게는) 삽화 덕분에 잉글랜드에서 빠르게 유명해졌다.
그의 이야기 속 주민들은 알몸으로 다녔고, 성기만 금이나 은판으로 가렸다고 한다. 일부다처제가 보편적이었으며, 간통이 적발되면 남편은 정조를 어긴 아내를 먹을 권리가 있었다. 평소 뱀을 주식으로 삼는 식문화에 비하면 '나름의 변화'였다. 살인범은 거꾸로 매달려 화살에 맞아 처형되었고, 매년 한 번 1만 8천 명의 소년 심장으로 제사를 지냈는데, 사제들은 이를 구워 먹었다고 했다.
이 모든 내용은 1704년 출간된 팔마나자르의 저서 『포르모사의 역사와 지리에 관한 개관(An Historical and Geographical Description of Formosa)』에서 읽을 수 있었다. 이 책은 나라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설명뿐 아니라 '포르모사어'까지 담고 있었다. 흥미롭게도 그의 묘사가 너무나 설득력이 있어서, 기만 행위가 폭로된 지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도 인공어(人工語)의 초기 사례 중 하나로 소개되기도 했다.
당연히 이 책은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고, 조지에게 명성과 부를 안겨주었다. 그는 영국 전역을 돌며 강연을 열고 연회와 각종 행사에 이색적인 볼거리를 더했다. 파란 눈에 흰 피부를 가진 남자라는 점은 시간이 지나며 살롱에서 불편한 질문을 낳기 시작했지만, 그 역시 능숙하게 받아넘겼다.
팔마나자르가 그린 포르모사 지도
"내 피부색이 왜 이렇게 창백하냐고요? 포르모사 사람들은 지하에서 살아 햇빛을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왕립학회 청문회에서 천문학자 에드먼드 핼리(Edmond Halley)가 따져물었다. "그래도 정오에는 굴뚝으로 태양빛이 들어오지 않겠습니까? 그곳은 아열대 땅이잖습니까." 일리 있는 지적이었다. 사기꾼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우리 굴뚝은 나선형이라 햇살이 바닥까지 닿지 않습니다"라고 받아넘겼다.
팔마나자르는 그토록 신빙성 있는 인물이었기에,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포르모사 역사를 가르치라는 제안까지 받았다. 불행히도 대부분의 거짓말이 그렇듯, 이것 역시 결국 드러나고 말았다.
무지의 시대
조지 팔마나자르의 이야기에는 의혹이 제기되었지만, 처음에는 소수의 목소리에 불과했다. 게다가 그중에는 성공회 사회에서 폭넓은 신뢰와 호감을 얻지 못한 인사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해가 거듭될수록 '포르모사인'의 말을 의심하는 회의론자들이 늘어났다. 결국 저자 스스로 기만 행위를 인정했지만, 그 전모는 그가 사망한 지 1년 후에야 공개되었다. 사기꾼의 진짜 자서전 『***의 회고록, 통칭 조지 팔마나자르(Memoirs of ****, Commonly Known by the Name of George Psalmanazar)』가 출간된 것이다.
이 자서전에서 그는 기만의 규모는 물론, 모든 속임수를 얼마나 치밀하게 준비했는지까지 상세히 밝혔다. 그는 포르모사에 대한 묘사를, 당시 아즈텍과 잉카 문명의 흔적을 찾아 떠난 여행기와 일본에 관한 기록에 기반해 작성했다.
흥미롭게도 자신에 대한 관심이 식기 시작하자 조지는 다시 펜을 들었다. 이번에는 소설을 쓰기 위해서였다. 불행히도 이 허구의 이야기들은 첫 번째 저작만큼 잘 팔리지 않았다. 그는 1763년 세상을 떠났으며, 말년의 몇 년은 그를 아꼈던 후원자 한 명이 지원한 연금으로 보냈다.
오늘날 이 기만극의 역사를 보면 경탄이 절로 나온다. 어떻게 그렇게 많은 사람이 조지의 말을 믿었을까? 하지만 기억해야 할 점이 있다. 17세기와 18세기가 교차하던 시절, 유럽인들의 다른 나라, 특히 먼 대륙에 위치한 나라들에 대한 지식은 미미했다. 대중매체는 없었고, 유럽인 상당수는 문맹이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상상력을 자극하고 심장을 오싹하게 만드는 기묘한 이야기를 갈망하고 있었던 것이다.